"똑같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일지라도 꼭 정상에 올라야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 중턱에 피어있는 꽃만 보고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약수터의 물만 마시고 와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산에 버려진 휴지를 줍고 오면서 더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고 그저 산 중턱에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 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 인생이 먼저예요> 이진이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글을 쓰는 것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으면서도, 유쾌하지도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쓰는 그녀의 마음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를 책상 앞으로 끌어당겨 놓는 것일까.
투박한 나무 책상의 냄새와 잘 어울리는, 바디감이 묵직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좋은 것은 아닐까. 책을 옆에 두고 있는 순간의 지적인 만족감이 좋은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늘어지게 되서 옆 동네 카페에 가보기로 한다. 큼지막한 쇼퍼백에 노트북과 읽고 있던 책을 한 권 넣는다. 필통과 마우스도 잊지 않고 쓸어 담는다. 필통에는 검은색 볼펜 두 자루, 핑크색 볼펜 한 자루, 뒷장까지 스며들지 않는 형광펜 한 자루와 수정테이프, 립스틱과 아이브로펜슬 한 자루, 안약이 들어있다. 뺄 건 뺀건데도 불룩해진 필통은 딸아이가 학원에서 받아온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내 취향대로 사는 사치같은 것은 부린지 오래다. 아이가 어디에선가 선물 받아온 노트, 다이어리, 볼펜 등으로 내 취향을 대신하는 삶. 그래도 좋다. 집 밖으로 나와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쪽 어깨가 제법 무겁지만, 가벼운 척 사뿐히 걸어 카페로 이동한다. 별다방만큼이나 요즘 많이 보이는 대형프랜차이즈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으니 글을 쓸 때는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 곳으로 온다. 동네의 커피 맛 좋은 작은 카페 <lonely>의 이용이 점점 뜸해지니 괜히 혼자 미안한 마음을 안은 채. '그러니까 사장님. 카페 이름이 론리가 뭐에요.' 애정하는 카페 론리의 사장님이 부디 외롭지 않아하며 오래오래 그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기도라도 드려본다.
사진: Unsplash의Rizky Subagja
커피를 주문하고 노트북을 켠다. 어떤 내용을 쓸까. 앉자마자 진동벨이 울린다. 크레마가 없는 걸 보니, 앞 전의 손님이 샷 추가를 하며 남은 에스프레스를 사용한 건가 싶어 순간 마음이 쿵했다. 원두 가는 소리가 들렸던가. 못들은 것 같은데. 뭐, 커피를 마시러 온 건 아니니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장소를 찾아 온 것이니까 자릿값으로 치자.
책도 있고, 써 내려가야 할 빈 문서도 있고, 우디향 진한 콘센트 테이블도 있으니 충분히 좋다.
모니터 화면 속 커서는 계속 깜빡거리는데 한 줄도 쓰지 않았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