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5: Dec. 31st, 2020 (10 AM)
새벽 3시쯤 왠지 잠에서 깨서 한동안 다시 잠들지 못했다. 잠 들지 못하고 깨어있으려니 떠오르는 여러가지 생각 중에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실감과 곧이어 밀려드는, 한 해 동안 대체 뭘 했지, 라는 자책이 자꾸 맴돌았다. 1년 전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게 먼데, 그 긴 시간동안 자랑스럽게 성취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건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도 꼽지 못할만큼 적은 것만 같았다. 연초에 세웠던 야심찬 계획들 중 해 낸 것보다 해 내지 못했던 것들이 더 크게만 보였다. 괜히 싱숭생숭해져서는, 어차피 잠도 안오는데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일을 할까, 그러면 1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을 조금은 줄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새벽 다섯시가 넘어서야 다시 잠이 들었다.
조금 늦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친구들로부터 새해 인사가 도착해있었다. 한국보다 시간이 느린 해외에 살면서 명절 인사 생일 축하 인사 같은 걸 조금 앞당겨 받을 수 있다는 건 사소하지만 달콤한 특권이다. 힘든 한 해였지, 새해에는 더 행복하자, 라는 기운찬 인사를 눈 뜨자마자 잔뜩 받고 나니 밤새 우울했던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꽉 차 올랐다.
올 한 해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아마 이게 아닐까 생각한다. 우울함에 깊게 빠지지 않는 것. 좌절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금방 다시 회복해내는 내가 된 것. 지나간 일을 후회하느라 해답도 없는 자괴감에 빠지기 보다는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가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얼마 전, 남편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사람에게는 우울감이 좀 있구나, 라고 느꼈다고 말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꽁꽁 잘 숨기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그 시기는 처음 대학원에 입학해서 꽤나 의욕에 차 있을 시기였는데도 그런게 보였다니 과연 가끔 희한할 정도로 예리하게 사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는 사람답다고 생각했었다. 남편이 본 그대로 나에게 경미한 우울감은 늘 친구처럼 함께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원인은 대체로 자책이었다. 워낙 욕심도 많고 이상도 큰 사람인데 머릿속에 그리는만큼 해 내지는 못하다보니 나 자신에 대한 원망과 실망이 늘 뒤따랐다. 어제도 쓰레기처럼 보냈네, 엊그제도 그랬는데. 생각해보니 지난 몇주가, 몇달이, 반년이 계속 그랬던 것 같아. 나는 아마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거야. 이런 생각들로 정말이지 암흑같이 보냈던 시기도 있었다. 감정적이기도 한 사람이라 한번 그런 감정에 빠져들면 요령 있게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아니 그럴 생각도 없이, 그저 우울해하며 울적해하며 지내온 시간도 길었다.
스트레스 관리에 대한 생각을 정말 많이 할 수 밖에 없었던 올 한 해 동안 나 자신을 덜 힘들게 하며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상담하고 고민한 결과 얻은 것은 바로 이 유연성이다. 기분이 변화하는대로 그대로 놓아 두면서 너무 한가지 일에 천착하지 않고 조금 가볍게 살아가는 것. 우울할 때도 자책 할 때도 있겠지만, 의외에 곳에서 얻어지는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대단한 결심과 성취 없이도 그저 살아가며 느껴지는 다양한 기분을 그대로 누리고 그로써 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짜 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건강한 방식이라는 것을 올해의 나는 진심을 다 해 배울 수 있었다. 아침 일기를 쓰는 것도 현재의 내 마음을 정리하고 새로운 마음을 정비해나가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침에 받은 한 친구의 메세지처럼,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좋아, 그저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대단한 것 같다는 그 말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올 해의 나는 삶의 지표가 될만큼 이렇게 큰 교훈을 얻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이렇게 나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더 열심히 살아나갈 수 있을 내년을 기대한다. 어제의 내가 조금은 마음에 안 들었을지라도 오늘의 나에게는 아낌없는 응원을 보낼 수 있는, 내 삶에 대한 진정한 끈기와 애정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