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7: Jan. 20th 2021
읽고 쓰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자면 아마도 골방에 틀어박혀서 양 옆으로 수북히 쌓인 책들 속에서 홀로 고뇌하는 모습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고독하고 외골수 같고 세간의 일과 상관 없이 독야청청할 것 같은 그런 이미지가 왠지 멋있어 보인다는 막연한 동경도 있었던 것 같다.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꿈의 서재에 대한 오래된 낭만, 왠지 흐트러져있고 사방이 책과 논문들로 가득한 교수님들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살짝 두근거리던 마음,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연구실의 사진을 보며 그 공간에서 만들어냈을 한 천재 수학자의 세계를 감히 상상해보는 것...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 공부하는 삶에 대한 이미지들이다.
여느 직업이 그러하듯, 그렇지만 이런 공부하는 삶에 대한 이미지도 사실 현실과는 다르다. 일단 내 공부방에는 책이 거의 없다.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이사를 몇 번 거치면서 책이 얼마나 거추장스런 짐이 되는지를 여실히 깨달아서이기도 하고, 최근 몇년 사이에는 탄소 사용량(carbon footprint)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종이책을 덜 소비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비드가 시작되면서는 그나마 도서관에서 빌려보던 책들에 대한 접근도 반강제적으로 모두 이북이나 pdf 파일의 형태로 바뀌기도 했다. 여전히 너무 좋아하는 책은 종이책으로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 대한 로망이 있기는 하지만, 노트북에 수백 수천권의 책을 소장하고 간편히 언제든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는 그 가벼움이 마음에 들기도 한다.
최근 들어서는 공부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과의 특성상 매일 랩에 출근해서 공동 작업을 해야 하는 대학원생들도 있겠지만 인문계열에 있는 나로서는 혼자한 생각을, (대부분 죽은 사람들의) 책을 보며 발전시켜서, 혼자 글로 표현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고독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친구들과 논문 쓰기 소모임을 하면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물론 각자의 프로젝트가 다르기 때문에 논문에 직접 도움을 주는 건 아니지만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연대, 이 과정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공감, 그렇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토닥거림 같은 것들을 주고받고 있다보면 내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어떤 집단 안에 속해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닫게 된다. 이번 학기에는 TA만 9명이나 되는 대형 강의에서 TA를 하게 되었는데 매주 있는 TA들의 모임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업무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티칭과 공부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힘들다는 이야기나 학생들과 있을 수 있는 사소한 마찰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해법을 찾다보면 이상하리만치 굉장한 위로가 된다.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동기부여가 되어주고, 비슷한 힘듦을 이해하며 서로 기꺼이 응원을 나누어준다. 같은 수업을 들으며 함께 웃고 울었던 동기들, 자신이 없어 울고 있었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교수님들, 직접 만나기 힘든 상황에서도 계속 줌 미팅으로 연대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고마운 노력들... 이런 것들로 인해 지금껏 대학원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고 공부에 대한 자극과 동기부여도 계속해서 얻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오늘 하루도 더 열심히 살아내어서 나도 누군가에게 거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동료이자 친구들에게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부터 좋은 에너지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