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은 아니지만 도장깨기 그림 배틀
“아아, 여기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지금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러시아 대 대한민국, 대한민국 대 러시아의 그림 배틀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입니다.”
비어있는 스케치북에 아내의 스케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지난 일주일간의 러시아에서의 느낌을 고스란히 표현하듯 슥슥슥 그어지는 감각적인 손놀림. 나는 그 장면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 옆칸에서 어린 소녀의 초상화를 그리던 마도로스 모자를 쓴 아저씨가 아내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아저씨. 아저씨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기 시작했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는 상황이다. 갑자기 러시아와 대한민국 대표가 되어버린 아저씨와 아내의 보이지 않는 그림 각축전. 아내 앞에선 러시아 아줌마들이 아내의 그림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이에 러시아 아저씨도 질세라 더욱 심혈을 기울이며 진지한 예술 분위기를 연출하기 시작한다. 아마 그림을 그려준 꼬마 소녀에게는 인생 최고의 걸작이 선물될 것 같다. 아저씨가 모든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으니깐.
스케치를 마치고 채색에 들어간 아내. 여행을 하는 동안 그림을 그리기 위해 휴대용 팔레트와 물감, 붓도 한국에서 공수해왔다. 미술을 전공했던 아내가 화가가 되진 않았지만 미술 선생님으로서 그간 많은 아이들을 가르쳐왔다. 이렇게 여행의 감상을 그림으로 남기면서 아내가 예술활동을 하는 걸 바라보는 게 남편으로서 너무 기뻤다.
아저씨는 사실적 인물화를 그린 반면 아내는 러시아의 대표 인형인 마트료시카 인형 안에 이곳에서 보고 경험하고 먹었던 다양한 주제를 혼합하여 표현하는 창의적인 그림을 그렸다. 수십 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통의 승리냐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 엉뚱한 새댁의 승리냐 결과는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칭찬으로 아름다운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나의 주관적인 평가는 아내의 승리다. 후훗.
우리는 아침에 배낭을 다 짊어지고 최악의 호스텔에서 체크아웃을 했다. 오늘 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탑승해야 한다. 해가 저물 때까지 즐거웠던 유원지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길거리에 가득한 주말을 즐기러 온 나들이객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페이스페인팅을 해주는 젊은 아티스트들, 아이스크림을 파는 장사치들 등 여유롭고 평안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내가 그림을 거의 완성해 갈 무렵 한 청년이 다가왔다. 이 자리에서 자기 그림을 전시하고 팔아도 되냐는 질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옐레나. 액자그림을 팔고 아이들 얼굴에 페이스 페인팅을 해주는 젊은 예술가였다. 매주마다 이 자리에서 그림을 파는듯한 그녀는 익숙하게 작품들을 배치하고 아이들 페이스페인팅용 견본과 가격이 적힌 광고판을 설치했다.
아내와 함께 그녀가 작품 세팅을 도와주었다. 고마워하는 그녀에게 아내가 물었다.
“옐레나는 꿈이 뭐야?”
영어를 못하는 그녀에게 구글 번역기를 활용해 러시아말로 질문을 했다. 그녀의 답변 또한 러시아 말이었는데,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손짓 발짓과 각종 분석을 거친 결과 아래와 같이 말한 것 같다.
“응 내 꿈은 소박하지만 명확해.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내 그림을 누군가에게 팔면서 생활을 이어가는 게 행복하거든. 하지만 그림 활동을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싶어. 지금은 이렇게 길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밖에 없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개인 화실을 갖고 싶어. 그리고 이렇게 길에 전시하는 것보다 작품을 더 보기 좋게 전시하는 갤러리를 가지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
“그때가 언젠지 정확히 모르지만, 지금 너의 마음과 자세가 그 길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 같아. 나중에 러시아에 와서 꼭 네가 그린 그림이 있는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보면 좋겠어. 힘내 엘레나.”
아내는 아까 전 그린 마트료시카 인형 그림과 옐레나의 정물작품을 각각 들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하나, 둘, 셋, 찰칵!”
또 한 장의 추억 사진이 탄생한다.
“잘 가 썬맨, 조이. 즐거운 여행하길 바라.”
“내가 이 자리를 아까 전부터 뜨끈하게 달구어놨으니깐 다음은 너에게 맡길게! 안녕.”
날이 저물려면 아직 멀었지만, 옐레나의 장사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우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