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식구가 단출해서 어지간하면 쿠팡이나 컬리로 장을 본다. 제사라든가, 생일이 오든가, 명절이 되어야 시장에 간다. 예전엔 학교 나가셨던 시어머님이랑 토요일마다 장에 다니곤 했었다. 시어머님은 꼭 같이 가자고 하였고, 다니면서 인사도 시켜주고 단골도 알려주셨다. 그렇게 시장은 가까운 나들이 장소였다. 그러다가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어느 날 친정아버지가 전화를 하셨다. “시간이 되면 잠시 시장으로 오면 좋고, 바쁘면 안 와도 괜찮다. 시장에 있는 돼지국밥집인데 출출해서 잠시 들렀다” 하시며 전화를 끊으신다. 시댁에서 누워계신 시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나를, 잠시라도 보고 싶어 오신 것이다. 같은 대구에 살지만 시댁에 있으니 딸을 보러, 맘대로 오지 못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얼른 치워두고 시장으로 달려간다. 아버지는 소주 한 병에 국밥을 안주삼아 드시고 계셨다. 술이 남으면 “또 올 테니 잘 넣어두소” 하시며 주인아주머니께 맡겨두고 가셨다.
사업을 하셨던 분이라 늘 바쁘고, 엄하시던 아버지도 환갑을 지나면서 많이 유해지셨다. 소소히 지낸 일들을 얘기하며 한잔씩 하신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며 키운 오 남매가 다 출가해서 멀리 살고들 있다. 그나마 대구에 있는 나를 보러, 가끔 이렇게 시장으로 오셨다. 아버지도 어떻게 부담 안 주고, 얼굴 보러 갈까? 생각하셨단다. 시댁 들어갈 땐 뭐라도 사서 손에 들려주셨다. “너 지금 시장 다녀 가는 거야” 하며 건네주셨다.
그 당시 아버지는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네 아이가 아플 것을 시어머님이 대신 앓아 주신다고 생각하고 잘해드려라” 하셨다. 사실 뭐라 말씀하시겠나. 기약 없이 해 내야 하는 딸을 보며 아버지도 고민이 드셨으리라. 뭐라도 다독여 주고 싶어 그렇게 가끔 오셔서 손도 잡아주고, 고맙다고도 하셨다. “네가 내 딸이라 좋구나”라고도 하셨다.
예전에 아버지는 우리에게 별명을 지어주었다. 엄마는 뭐든 사는 것을 좋아하셔서 ‘사고지비’, 언니는 책만 본다고 ‘보고지비’였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사진반을 하면서 출사를 많이 다녔고, 또 워낙 어디든 가고 싶어 한다고 ‘가고지비’, 막내는 먹는 것을 좋아해서 ‘먹고지비’였다. 그래서 “우리 가고지비 못 다녀서 어쩌지?” 하시며 “다 때가 온다. 너도 할 일 하고 나면 좋은 시간들 온다.” 고 위로해 주셨다. 그렇게 찾아와 주고 생일이면, 사과 좋아한다고 한 박스를 집 앞에 두고 가시곤 했다.
아버지 아지트에서 기운 받으며 9년의 세월을 잘 이겨냈다. 이제는 우리 집으로 오셔도 되는데, 멀리 가신 아버지는 대답이 없다. 수발하는 자식을 보며 마음에 짐이 되셨을까? 하루도 누워 계시지 않고 심장마비로 영면하셨다. 나는 또 그것이 맘이 아팠다.
아직도 시장에 아지트는 남아있는데, 아마도 못 다 드신 술병도 있었을 터… 가끔 아주머님도 말씀하신다. “그런 아버지 없는데… 너무 일찍 가셨어.” 그때 그집은 이제 나의 단골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