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돈까스
처음 어머니의 민머리를 보게 된 건 항암치료를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서였다. 언제부터 머리가 빠져 가발을 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꽤 오랜 시간을 숨겨온 건 사실이었다. 물론 어느 순간 직감적으로 어머니의 머리가 가발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원인을 알고 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건 확연히 달랐다. 우연이 문틈 사이로 어머니가 가발을 벗고 정수리의 땀을 닦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를 피했다. 이후에도 계속 모르는 척 했지만 그날 이후 어머니를 보는 눈길이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해 겨울 방학을 얼마 앞둔 초겨울이었다. 아버지는 모처럼 병원에서 돌아온 어머니와 우리 형제를 자신의 포니 승용차에 태우고 일전에 갔던 경양식 집으로 향했다. 걸어서 30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환자인 어머니 때문에 차를 가져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평소보다 짙은 화장과 진한 색색의 옷을 입고 나왔다. 창백하고 마른 몸을 과한 치장으로 가리려는 듯 어딘가 기괴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식전 스프가 나오자 형이 괜시리 장난을 쳤다.
- 이거 먹고 가는 거 알지?
- 하지 마. 나도 안다고.
형은 내가 처음 돈까스를 먹을 때 식전 스프를 보고 이게 끝이냐고 했던 걸 기억하고 놀린 것이다. 이제 나도 경양식집 예의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접시에 놓인 돈까스를 잘라주었고 우리는 각자 서툰 칼질로 고기를 잘랐다. 반듯하게 잘라낸 어머니의 접시와 달리 내 것은 크기도 제각각에 소스도 여기저기 튀어 모양새가 엉망이었다.
어머니는 돈까스를 전혀 먹지 못했고 밥과 양배추 쪼가리만 깨작깨작 입가에 묻혔다. 처음부터 이곳은 어머니와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애초에 말기암 환자가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식당이라는 게 존재하기나 할까.
- 둘이 나눠먹어라.
아버지는 어머니가 남긴 돈까스를 형과 나의 접시에 사이좋게 나눠주었다.
- 졸업식이랑 입학식 가야 될 건데 엄마가 갈 수 있을란가 모르겠다.
내년에 중학생이 될 나에게 어머니는 옅은 미소를 얹어 말했지만 어차피 별로 기대하지 않았기에 아무 느낌이 없었다. 단지 눈앞의 맛있는 돈까스를 열심히 입속으로 집어넣었고 어머니는 옆에서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차를 향해 뛰어갔다. 부산의 겨울은 상대적으로 따뜻했지만 추위를 심하게 타는 나로서는 빨리 따뜻한 차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외투를 재차 매만져준 뒤 별말 없이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다. 문득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려보면 같은 장소 같은 사람임에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어머니는 과거에도 암 환자였지만 상태가 지금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돈까스를 먹을 수 있었고 차가 없어도 양손에 아들들의 손을 잡고 걸어올 수 있었다. 가발을 쓰지 않았고 짙은 화장도 필요 없었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내 졸업식과 입학식에 오지 못했고 이듬해 여름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아버지는 왜 어차피 먹지도 못할 어머니를 데리고 그곳에 다시 간 걸까. 당시만 해도 돈까스는 서민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고급 메뉴였다. 어쩌면 어머니는 살아있는 한 가족과 함께 하는 마지막 만찬이라 생각한 게 아닐까. 실제로 이후 어머니의 상태는 더욱 나빠져 병원에만 계속 누워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날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기억해둘 걸 그랬다. 그때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어쩌면 죽음을 앞둔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기보다 처음 이곳에 올 때보다 한뻠씩 더 자란 아이들이 남은 돈까스까지 맛있게 해치우는 걸 보고 잠시나마 슬픈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돈까스는 적어도 나에겐 흔한 먹거리가 아닌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음식이다. 그날의 만찬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감사하고 맛있게 돈까스를 먹을 생각이다.
* 오늘로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