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흰죽
유년 시절의 상당 부분은 방에 눕거나 앉아 있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개근상을 받지 못했다. 특별한 지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열병으로 인한 잔병치레가 잦아 툭하면 결석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한번 열이 오르면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라 가족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오죽하면 전용 체온계가 항상 비치되어 평상시에도 정기적으로 겨드랑이 사이에 넣고 체온을 재곤 했다. 모두에게 당연하고 익숙한 36.5도지만 내 작은 몸뚱이는 그곳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이 반복되었고 잠재적 환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원래 성격이 내향적인 데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 많다 보니 당연스레 혼자에 익숙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친구가 그립다거나 밖에서 뛰어노는 것에 대한 동경 같은 건 그닥 없었다. 맑은 날이면 형이랑 야구 글러브를 끼고 근처 운동장에서 캐치볼을 주고받고 주말엔 부모님이 나가는 테니스 동호회를 따라가 몇 시간씩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부모님은 혼자 방에서 꼬물대고 있는 자식이 안쓰러운지 좋아하는 로봇 장난감을 사주는데 인색하지 않았고 문방구 앞에서 떼를 쓰지 않아도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 오후였고 집에는 아버지, 형, 나 이렇게 남자 셋만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고모네로 놀러 갔고 어머니도 간만에 볼일이 있어 집을 비웠다. 잠잠했던 열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고 체온을 재보니 38도. 놀란 아버지는 병원에 데려가려 했지만 난 괜찮다고 말했다. 내 몸은 많은 열병 치레를 거치며 체온을 느끼는 감각이 자연적으로 체화되었다. 이 정도면 버틸만한지 병원을 가야 하는지에 대해 어른들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평소보다 더 강하게 안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병원이 무서워서도 아니었고 정말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진짜 괜찮나? 병원 안 가도 되겠나?
- 응. 진짜로 안 아프다.
기운이 없고 아픈 건 맞지만 병원에 갈 기준에는 미달이라고 자체적으로 판단했다.
- 밥은 묵을 수 있겠나?
- 안 묵고 싶다.
아버지는 다시 정상 높이로 내려간 체온계를 보며 방금 찍힌 38도를 의식했는지 쉬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 죽이라도 좀 묵을래?
- 아니. 내 한숨 잘란다.
- 그래도 밥때 됐으니 뭘 좀 묵어야 될 건데....
아버지는 밖으로 나갔고 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아 멍하니 천장 무늬만 세어보았다.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져야 돼.
얼마 뒤 방문을 열고 아버지가 양손에 밥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눈만 감고 잠들지 못하던 나는 다시 일어나 앉았다. 상 위에는 냄비에 담긴 흰죽이 있었고 종지에는 김치 몇 조각이 보였다.
- 일단 묵고 자거라.
흰죽이라면 지겹도록 먹어왔지만 아버지가 만든 흰죽은 처음이었다. 물의 양이 여느 때보다 많아 보이지만 소금 간이 적절히 배어 있고 깨까지 촘촘이 뿌려져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입맛이 없음에도 한두 숟갈 들어가다 보니 거부감이 가시고 바닥까지 싹 비워냈다. 따뜻한 물 한잔까지 마시자 온몸에 나른한 온기가 퍼지며 졸음이 절로 찾아왔다. 아버지가 상을 거둬가고 몇 분 후 잠이 들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체온은 37도로 내려갔다. 비록 36.5도에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떨어진 1도의 열은 걱정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당시엔 아버지가 죽을 직접 끓였다는 사실이 의아하고 생소하기만 했다. 간혹 어머니와 할머니 옆에서 거드는 건 봤어도 아버지 혼자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형적 옛날 노인인 할머니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는 자체를 허가하지 않았는데 그날 아버지는 나 때문에 이 불문율을 보기 좋게 깨버린 것이었다. 이후 아버지가 차려준 음식을 먹을 기회는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분명히 있긴 했지만 기억이 흐릿한 걸 보니 그날의 흰죽만큼 특별한 것은 없었을 거라 짐작된다.
그 시간을 뒤늦게 상상해보면 묘한 기분이 찾아든다. 냄비에 생쌀을 넣고 물을 붓는 아버지의 모습이란..... 아마 물의 양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몇 번 더했다 뺏다를 반복했겠지. 익숙치 않은 부엌과 조리기구 앞에서 두툼한 손과 서툰 손짓을 지닌 그는 무슨 마음으로 죽을 끓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어색함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 흥미로운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하고 방에 누워있던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릴 때부터 흰죽을 그렇게 먹었으니 질릴 만도 하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 죽을 더 좋아한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자연스레 순하고 부드러운 맛을 찾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은 본죽을 비롯해 다양하고 맛있는 영양죽이 많이 출시되어 집에서 흰죽을 끓일 일은 없다. 무엇보다 열병에 시달리던 아이가 커가면서 겨울철 감기조차 안 걸리는 체질로 바뀌었다는 점은 스스로도 믿기 힘들 만큼 고무적이다. 더는 열병의 상징인 흰죽을 먹을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지금은 노쇠해져 다리를 절뚝거리지만 젊은 시절 아버지는 동 나이대 어른들보다 힘이 세고 강골이었다. 그 단단함에 수십 년의 세월을 의지해왔는데 그날의 죽은 반대편에 놓인 또 다른 사랑의 형태를 본 것 같았다. 약한 막내아들이 자신처럼 건강하고 강해지길 바라는 소망을 담아 1도를 극복한 흰죽 한 그릇의 힘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