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와 슈샤드
고등학교를 다니던 90년대 초 혼봉이라는 말이 있었다. 당연히 표준어는 아니고 대중에게 통용되던 단어도 아니라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혼봉은 혼합 봉고라는 뜻인데 당시엔 승합차를 봉고라는 이름으로 통칭했고 혼합은 남녀가 섞여 있음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남녀학생이 봉고를 같이 타고 등하교를 하는 것이다. 남녀공학 자체가 희소했던 보수적인 시대라 드물긴 해도 어쨌든 혼봉은 차 안에서 남녀 고등학생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자리였다.
고3이 되면서 입시 부담은 수험생들의 어깨를 한층 더 무겁게 내리눌렀다. 야자시간이 9시에서 10시로 연장되고 하루 15시간을 온전히 학교에서 보내야 했기에 통학이 긴 학생들은 그룹을 짜서 봉고를 섭외했다. 우리 집은 학교까지 걸어서 30분이라 멀다고 할 순 없지만 고3은 최대한 체력을 아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문제는 애매한 거리라 아이들을 모집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때마침 아버지의 지인 중 D여고 봉고 기사가 있었고 자리도 몇 개 비어있었다. 나는 곧바로 집 근처에 사는 반 친구 3명을 섭외해 봉고에 태웠다. 이로써 Y고 남자 4명, D여고 여자 6명으로 구성된 혼봉이 완성되었다.
혼봉 차량은 기아 베스타 12인승. 혼봉 소문이 돌자 반 아이들의 시선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여자, 여학생이라는 말만 들어도 아드레날린이 생성되던 시절. 차 안에서 알콩달콩 이야기꽃을 피우며 조잘대며 웃는 여고생들. 여자가 6명이나 되니 맘에 드는 아이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고 충분히 사춘기의 풋풋한 사랑 열매가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감옥 같은 수험생활의 한 줄기 빛이자 청춘의 낭만이여. 오~ 그 이름은 혼봉! 그들이 상상할법한 풍경은 대충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 실상은 그딴 것과 거리가 멀었다. 해도 뜨기 전인 6시 30분에 탑승하면 잠이 부족해 짐짝처럼 어프러져 눈을 감았다. 15분 남짓의 이동시간엔 다들 꾸벅꾸벅 졸다 학교 앞에 도착했다. 하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종일 학교에서 진을 빼고 녹초가 된 상태라 빨리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만 가득해 앞에 있는 여학생에게 도통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건 D여고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고 깊은 밤 실내등을 끄고 달리는 혼봉 안에는 적막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개학 후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민철이 뜬금없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 니들 돈 좀 있냐? 토요일이 화이트데이인데 여자애들 선물 사게.
- 야 우리는 발렌타인데이 때 못 받았잖아. 근데도 주자고?
- 민철은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이 서생들이 심히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발렌타인데이는 혼봉하기 전이잖아. 그래서 니들 할 거야 안 할 거야?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천원씩 내놔봐.
- 왜 니가 알아서 하냐. 혼자 기집애들한테 잘 보이려고?
- 아이~씨 그럼 같이 사러 가던가.
우리는 민철의 요구대로 천원씩 각출해 가나 초콜릿과 밀크카라멜을 샀다. 원래 화이트데이에는 사탕을 주는 게 정석이지만 사탕은 여자애들이 별로 안 좋아할 거라는 그의 말에 따라 아이템을 바꾸었다. 다음 날 아침 민철은 비닐로 대충 싼 6개의 포장지를 D여고 학생들에게 내밀었다. 이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듯 놀란 표정이 그득했고 곧바로 까르르 날것의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밝은 아이들인데 그동안 왜 데친 나물처럼 축 처져 있었을까. 고3이라는 무게가 아이들의 활력을 훔쳐갔어도 이 순간만은 생기 돋는 사춘기 여고생의 찐 모습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 여학생들은 화이트데이에 대한 보답으로 리본이 달린 박스 4개를 가져왔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예쁜 박스 안에는 오리온 슈샤드 초콜릿에다 과자, 사탕, 껌 등이 담겨있었다. 비록 개인적인 선물은 아니지만 여학생한테 이런 걸 받아 본건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이었다. 이날 이후 경직됐던 혼봉 분위기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탈 때마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꾸벅대던 졸음의 흔적도 사라졌다. 왕복 30분의 등하교 혼봉은 고등학생 10명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방학 때를 제외하면 혼봉은 고3 내내 유지되었다. 이제는 사는 집도 다 알고 각자의 학교생활에 대한 정보 교환도 많이 이뤄져 편한 사이가 되었다. 남녀가 같이 있으면 정분이 싹트기 마련이라 주말에 따로 만나는 커플도 생겼다. 나 역시 매일 대면하다 보니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생겼다. 이름은 현옥이였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웃을 때 눈이 일자로 변하는 상냥한 아이였다. 아직 연락을 주고받진 않았지만 수시로 말을 걸며 호감을 표시했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 따로 만나고 싶었다.
학력고사를 앞둔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며 엿과 초콜릿을 주고받았고 혼봉은 마침내 끝이 났다. 그해 겨울 나는 대학에 합격했고 현옥이는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 니네 집 서울로 이사 간다며? 대학도 서울에 붙고 진짜 좋겠네. 서울 한 번도 안 가봤는데.
- 재수해서 내년에 붙으면 되잖아.
- 몰라 짜증나. 수능은 또 뭐야. 왜 이럴 때 시험이 바뀌는 건데. 나 이러다 전문대도 못 갈 것 같애.
현옥이와의 개인적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서울로 상경 후 그녀는 자연스레 지워졌고 이듬해 대학을 갔는지 안 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6명의 여학생 얼굴을 다 기억할 순 없지만 어설프게 그려지는 몇 명의 윤곽은 떠 오른다. 상시 피로에 절어 있어도 풀잎에 멍울진 이슬처럼 반짝거리던 그 얼굴들. 지금 중년이 된 그들의 모습은 아무리 상상해도 그려낼 수 없었다. 우리는 고교 시절을 왜 그렇게 보내야만 했을까. 대학만 가면 만사형통이라는 막연한 희망만 믿고 세상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 삭막한 일상에서 짧았던 혼봉의 시간은 공부의 도구로서가 아닌 그해 열여덟 청춘에게 주어진 깜찍한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