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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Sep 04. 2023

게임 개발자 (3화 게임스쿨)

졸업을 1년 앞둔 시점의 상황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취업을 준비하던 대학원 진학을 하던 졸업 후 진로를 정해야 할 시기였지만 어느 쪽도 순탄치 않았다. 학과 공부는 애 저녁에 흥미를 잃어 학점은 선동렬 방어율에 견줄만한 1점대를 유지했고 토익을 비롯한 최소한의 취업 준비조차 설계도면이 없었다. 믿는 구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취업 난이도가 높지 않던 시절이라 학교생활을 아무리 개판 쳐도 졸업장만 잘 챙기면 대기업은 힘들어도 취업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수원에 있는 S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SKY처럼 과 점퍼 입고 어깨 힘 빡 들어갈 정도는 못 되도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법한 학교로 대충 코 후비면서 입학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나는 게임개발자가 되는 것만이 이 난국을 타개하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 확신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땄고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심정으로 휴학계를 냈다. 반대할 틈도 주지 않고 벌인 일이라 부모님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부모님 역시 F, D가 곳곳에 찍힌 성적표를 학기마다 받아들면서 그래도 좋아하는 걸 하면 뭐가 나와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의 발현으로 승낙 도장을 찍었다. 곧바로 나는 미리 점찍어둔 강남에 위치한 6개월 과정의 게임스쿨에 등록을 마쳤다.

     

스쿨이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내가 속한 클래스의 학생은 열 명이 되지 않았고 전체 수강생도 스무 명 내외에 불과했다. 보잘 것 없는 외형에 비해 그래도 졸업생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게임 관련 회사에 들어간 곳이었다. 오덕 냄새 작렬하는 방구석 찌질이들이 모여 있을 거라는 편견과 달리 허우대는 다들 생각보다 멀쩡했고 여학생도 한 명 끼어있었다. 평균 나이는 이십대 초중반 정도로 나와 비슷했고 강사들도 서른 전후로 젊었다. 수업은 주 3회로 C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프로그래밍, VGA 모드의 그래픽, 게임이론과 기획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수강생들이 모인 곳이라 첫날부터 강의실은 게임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학과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했던 학교생활에 비해 이들과 게임에 대한 수다를 떨면서 보내는 시간 자체가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모름지기 세상의 어떤 수업도 공부를 하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이 분리되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 안타깝게도 나는 너무 빨리 후자의 대열에 들어가 버렸다.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라며 긴장의 끈을 놓아버렸다. 삼국지와 대항해시대를 능가하는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 연일 뽕이 차올랐고 밝은 미래가 두 팔 벌려 우리를 환영해 줄 거라 믿었다. 상상은 그쯤에서 그쳤어야 했다. 우리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지 게임을 하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망각해버렸다. 나를 포함한 한 무리의 수강생들은 수업이 끝날 때마다 학원 컴퓨터에 모여앉아 늦게까지 어울려 게임을 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불법 시디를 구워주는 어둠의 아지트에 들러 게임시디를 공유하기도 했다. 당시 용산 굴다리 밑에서 여러 가지 게임을 모아놓은 불법 시디를 파는 장사치들이 있긴 했지만 이곳은 수천 개의 게임 목록 중 원하는 것만 뽑아 즉석에서 제작이 가능했다. 이쯤 되면 그냥 무장해제다. 게임에 미친 조력자들이 온갖 알짜 정보를 실어 나르며 뿜뿌를 넣어대는데 이 허약하기 짝이 없는 정신머리가 배겨날 수 있겠는가!

     

시디에 담겨있는 게임들을 집에 있는 컴퓨터에 설치 완료한 시점에서 이미 나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세상은 넓고 게임은 많았다. KOEI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편협한 우물 안 맹꽁이적 사고였던가! 주인 없는 생선가게 앞에 고양이를 갖다 놓은 셈이라 온갖 장르의 게임들로 매일 밤을 지새웠다. 게임 개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게임을 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런 현상이라 집에서는 아무런 의심과 제재도 받지 않았다. 그 많은 게임들을 소화해내려면 항상 시간이 부족했고 점차 초창기의 중독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이 중독자 그룹의 멤버들은 수업은 뒷전이고 게임에만 몰두했다. 게임이라는 마약이 든 주사기를 서로에게 마구 꽂아대던 중 어느덧 6개월 과정의 절반이 지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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