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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Sep 25. 2023

애니메이터 (1화 라젠카와 해모수)

97년 3월, 나는 1년의 휴학을 마치고 4학년 1학기를 맞이했다. 게임 개발자의 길이 좌절된 뒤 가뜩이나 흥미 없던 학교생활은 한층 더 의욕을 잃어갔다. 보통의 대학 졸업반이라면 학과 공부보다 취업 준비와 졸업 논문에 몰두해야 할 시기지만 나는 20 학점을 꽉꽉 채워가며 수업을 들어야 했다. 신입생 때부터 누적된 F 학점의 숫자를 메우기엔 마지막 1년이라는 시간이 빠듯했다. 그나마 교양 쪽은 문제가 없었는데 낙제 과목이 전부 전공 쪽이라 선택의 여지없이 반드시 학점을 이수해야만 졸업이 가능했다. 얼마나 전공인 유전공학에 관심이 없었는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1학기를 겨우 F 없이 마쳤지만 평점이 2점대였으니 대충 전 과목을 C,D 로 도배했다고 보면 된다. 2학기가 되어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20 학점 가까운 수업을 강제 신청했고 끌려가듯 강의실로 출근해 따분하게 자리만 채우다 집으로 돌아왔다. 같은 과 동기들은 대학원 진학, 기업체 면접 등으로 마지막 학기를 분주하게 떠다니며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었다. 나는 특별히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없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시간을 물처럼 흘러 보내며 살았다.  


그때 나의 큰 즐거움이자 일과 중 하나는 케이블 채널 투니버스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었다. 소싯적부터 만화책과 만화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환장했는데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개국한지 1년이 넘었음에도 아직은 컨텐츠의 양이 풍부하지 않고 재방송도 많지만 언제든 티비에서 만화를 볼 수 있다는 메리트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그 즈음 방송과 잡지에서 국산 티비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 와 ‘녹색전차 해모수’의 제작 소식이 들려왔다. 욕 나오게 재미없는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던 내 마음에 드디어 서서히 잔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만화 중 로봇이 나오는 만화를 압도적으로 좋아했다. 국산이라고 믿었던 그 로봇들의 실상이 일제라는 게 밝혀졌을 때 받았던 충격은 적지 않았다. 심지어 국내에서 제작된 로봇 만화조차 대부분 표절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주인공 메카뿐만 아니라 적 캐릭터도 태연하게 베꼈고 일본 로봇물에 대가리만 갈아 끼워서 마치 우리 것인 양 슈퍼 태권브이라고 불렀다. 더 이상 태권브이가 자랑스럽지 않았고 추억을 도둑맞은 심정이었다. 왜 우리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로봇 만화를 만들지 못할까라는 실망이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순수 우리 기술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게다가 라젠카와 해모수 둘 다 로봇이 등장하는 작품이었다. 나는 방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오븐 속 빵처럼 기대감이 부풀어 올라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고 잡지를 사 모았다.‘모션’이라는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가 창간되었고 이례적으로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높아지는 분위기였다. 옳거니, 바로 이거였어.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이 생겼구나. 일본 애니메이션 쌈 싸먹는 작품을 내 손으로 탄생시켜 김청기 따위는 명함도 못 내미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거장이 되어 보자! 나는 2년 전 게임 개발자 때처럼 부모님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저는 애니메이터가 되겠습니다.”

“얼른 취직할 생각은 안하고 뭔 소리고?” 

“이번에도 잘 안되면 군말 없이 취업할 테니 한번만 믿어 주세요.”

“요즘 나라가 흉흉한 게 뭔 일이 터질 것 같다. 고마 졸업하고 아무데나 드가라”

“아버지 저에게도 꿈이라는 게 있습니다. 군대 면제 받아서 아직 시간도 있어요. 안 늦었다구요.”

“아이고, 저거 확 군대를 보내서 정신머리를 뜯어고쳤어야 했는데. 일단 졸업부터 하고 보자”

문제는 엉뚱한 방향으로 허무하게 해결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졸업을 못하게 된 거였다. 그해 겨울 IMF가 터져 나라가 부도나면서 학점마저 같이 부도가 났다. 전공과목 하나를 기어이 빵꾸 내면서 학교를 더 다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해 말 고대하던‘영혼기병 라젠카’와‘녹색전차 해모수’가 방영되었다. 견해를 간략하게 적어보자면 라젠카는 넥스트의 음악밖에 건질게 없는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탄생한 애니였다. 메인 로봇 가이런은 딱 봐도 성전사 단바인의 서바인을 모방한 티가 나고 스토리도 갈팡질팡 뭘 말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외부 입김으로 로봇을 억지로 몇 대 끼워 넣었는데 아무리 로봇 마니아인 내가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매력 없고 공감 안 가는 설정이었다. 작화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기존의 일본 애니메이션과의 차별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해모수 역시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라젠카와 같은 포지션으로 묶일만한 작품은 아니라 생각되어 안타까운 측면이 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좋고 전차,로봇,휴머노이드의 활용 조합도 나쁘지 않았다. 플롯의 골격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고 작화에서 왜색 느낌도 덜했다. 전체적인 완성도는 명작이라 부를 수 없지만 그 시절 이만큼의 결과물만으로도 어느 정도 가치는 있었다고 본다. 비록 두 작품 다 당초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제작에 뜻이 있는 이들에게는 작은 불씨를 심어주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할거라는 희망의 불씨. 하지만 어떤 누구에게는 시작도 끝도 미약함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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