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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Oct 10. 2023

이토록 흥미로운 스모 드라마라니

넷플릭스 드라마 리키시

스모를 처음 알게 된 건 막 서울에 올라온 스무 살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NHK 방송에서 스모 중계를 보고 있길래 옆에 앉아 같이 시청했다. 처음에는 일본식 씨름 정도로 생각했는데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았다. 결정적 차이점은 밀어내기였다. 씨름은 상대를 반드시 넘어뜨려야 하지만 스모는 도효라 불리는 모래판 바깥으로 밀어내기만 해도 승리가 인정되었다.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손바닥 치기와 박치기가 허용되기 때문에 격투기적인 요소도 존재한다는 거였다. 그밖에 자세한 건 몰랐고 중계하는 일본어를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꽤 즐겨 봤었던 기억이 난다. 배 나오고 뚱뚱한 거구들이 기저귀 같은 것 차고 진지하게 경기하는 모습이 시선을 끌었고 종종 체중이 가벼운 선수들이 무거운 선수를 이기는 광경도 흥미로웠다. 당시 스모 최고의 스타는 다카노 하나였다. 스모계의 전설적인 요코즈나 중 한 명으로 비교적 작은 체구와 말끔한 얼굴로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인기가 많았다. 한국으로 치자면 씨름판의 황제 이만기가 연상되었고 나 역시 다카노 하나의 경기는 자주 찾아보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스포츠에 대한 관심사가 야구, 축구, 농구 같은 인기 구기 종목으로 넘어가면서 스모와의 인연은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러던 올 여름 넷플릭스에서 스모를 소재로 한 드라마 리키시가 떠 있는 걸 발견했다. 퍼뜩 든 생각은 스모라는 소재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의아했다. 과거 ‘으랏차차 스모부’ 같은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지만 스모가 세계적인 대중성이 있는 운동도 아니고 출연 배우만 해도 최소 100킬로가 넘는 사람들로 캐스팅을 해야 할 텐데 이게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살이 뒤룩뒤룩 찐 성인 남성들의 벗은 몸을 봐야하는 시각적 피로감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스토리에 대한 기대감도 스포츠 장르의 뻔한 클리셰 조합과 일본 드라마 특유의 과장된 연기와 설정이 반복되지 않을까 짐작되었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다 보고 난 후 이 모든 게 기우였고 2023년이 아직 남았지만 올해 내가 본 드라마 중 최고의 선택이었다.     

덩치 있는 배우들을 대충 살 좀 찌워서 투입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를 연상시키지만 더 불량한 비호감 주인공 오제역의 이치노세 와타루를 비롯한 출연 배우들의 연기는 진짜 스모선수의 모습과 흡사했다. 등장인물들의 설정은 거의 다 스포츠 드라마에서 한번쯤은 봤을법한 캐릭터들이었다. 누구보다 스모를 사랑하지만 왜소한 체격 때문에 선수가 되지 못한 시미즈, 불행한 과거의 비밀을 간직한 주인공의 라이벌이자 최강자 시즈우치, 과거 자신의 모습과 닮은 오제에 대한 애증을 느끼는 스승 엔쇼, 오제의 가능성을 알아채고 자존심을 버린 채 아낌없이 노하우를 전수하는 선배 엔야, 요코즈나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늘 비교당하며 고뇌하는 류키, 스모계의 악습에 저항하면서도 오제와의 관계를 통해 스모를 이해하게 되는 여주인공 쿠니시마. 하지만 이 클리셰적 인물들이 평면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드라마 자체가 스모에 대한 현실적이고 진지한 자세를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남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고 극적으로 승리하는 스토리가 아닌 한편의 웰 메이드 스모 다큐멘터리를 접하는 것 같았다. 스모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어도 즐길 수 있으며 선수들의 두터운 살덩이에 대한 거부감도 어느 순간 눈 녹듯 사라진다. 한 가지 문제점이라면 초반부 스모에 대한 문제의식이 뒤로 갈수록 사라지는 건데 현 스모계의 눈치를 본 측면이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리키시는 나에게 인간의 몸에 대한 관점을 되돌아보게 만든 드라마였다. 일반적인 운동은 지방을 태우고 근육을 늘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제한급 투기종목이 아닌 한 감량이 증량보다 훨씬 중요하다. 운동선수가 배가 나오는 건 부끄러운 일이며 시각적으로도 군살 없는 단단한 몸매가 훨씬 선호된다. 하지만 폭식과 낮잠을 반복하는 게 훈련의 일과인 스모 선수들은 몸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역전시킨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작정 살만 찌운 사람들은 아니다. 스모 선수들은 균형감각과 버티는 힘을 키우기 위해 엄청난 근력 운동도 병행하고 있다. 이처럼 상호 모순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몸은 겉보기에 아름답지 않을지 몰라도 밑바닥에는 단단한 훈련의 결과물이 응축되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씨름처럼 일본도 갈수록 스모 선수층이 줄고 순수 일본인 요코즈나가 나오기 힘들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인 색채가 짙은 운동인 만큼 이런 흐름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리키시의 마지막은 오제와 시즈우치의 만화 같은 재대결 장면으로 열린 결말로 끝이 났다. 스포츠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성장 드라마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리키시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극중 오제의 변모는 뻔한듯 하면서도 꽤나 감동적이다. 재능만 있던 망나니 오제가 진지함과 독기를 가졌을 때 얼마나 괜찮은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온 몸에 도효의 모래가 튀고 흘러내린 땀이 젖꼭지와 산만한 배를 따라 줄기를 이룰 때 이 맨살이 뿜어내는 원초적 생동감은 극대화된다. 꼭 멋지고 잘생긴 주인공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고 응원하게 만드는 매력을 이 드라마는 선사하고 있다. 요코즈나를 향해 한발씩 나아가는 리키시 오제의 모습을 다음 시즌에서도 꼭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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