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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Oct 23. 2023

애니메이터 (3화 당신은 소질이 없습니다)

야심차게 애니메이션 학원에 등록을 했지만 첫날부터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림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래고 수강생들은 딱 봐도 나 그림 좀 그렸어 라는 아우라를 흘리고 다녔다. 수업은 종이에 직접 그리는 아날로그 작업과 그래픽 툴을 사용하는 디지털 작업을 병행하여 진행되었는데 문제는 아날로그 작업이었다. 내 그림 실력을 알 리 없는 강사는 첫날 만화 캐릭터 보고 그리기 광경을 목격한 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스케치북을 가져와 가로세로 선 긋는 연습부터 시켰다. 나는 남들과 달리 기초적인 연필 데생부터 시작했다. 원기둥, 상자, 사과같이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한번쯤 해봤을법한 작업을 다시 하는 셈이었다. 다른 수강생들이 본격적인 캐릭터 작업과 배경 스케치에 들어가는 동안 나는 아직도 시든 사과에 명암이나 칠하고 있었다.

- 잘하고 계십니다. 많이 좋아졌어요.

딱 들어도 영혼없는 강사의 칭찬 아닌 칭찬. 대체 뭐가 좋아졌다는 건지. 이깟 사과 몇 개 그리는 게 애니메이터에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걸까. 컴퓨터로 하는 디지털 작업은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다. 일러스트와 포토샾을 사용했는데 툴이라는 게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 기본 메뉴만 익히면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무엇보다 언제든 수정 가능하기 때문에 작업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해도 얼추 비슷하게는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수강생들과의 격차는 벌어지고 있었다. 미적 감각이라는 게 입시 공부처럼 시간만 때려 박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저들의 펜 끝에서 에반게리온, 세일러 문, 슈퍼 그랑죠가 나오는 동안 나는 여전히 제대로 된 캐릭터 하나도 완벽히 그려내지 못했다. 의욕은 나날이 떨어졌고 수업에서도 소외되어 갔다. 애니메이션 이야기로 수다를 떨던 수강생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강사도 은근 나를 건성으로 대하는 게 느껴졌다.

      

- 어제는 왜 안 나오셨어요? 요즘 결석이 잦으신데.... 괜찮아요, 더 열심히 연습하시면 됩니다.

열심히 하라고? 그말인 즉슨 열심히 안했다는 얘기네.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된다는 강사의 말을 믿고 싶었다. 내가 그림에 전혀 소질이 없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강냉이와 함께 그린 그림들, 반공 포스터 그리기 우수상 따위는 아무 소용없었단 말인가. 그림을 못 그리는 애니메이터가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 나는 학원 측에 상담을 요청했다.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게 소질의 문제인지 노력의 문제인지를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 소질보다.... 이쪽 일이 XX씨에게는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보세요, 그게 그 말이잖아. 너는 소질이 없고 해봤자 안 될 거라는 말. 차라리 좀 더 일찍 이런 말을 해줬더라면 빨리 포기했을 텐데 과정이 다 끝날 때가 되서 이게 무슨 짓이람. 나는 남은 한 달분이라도 수강료를 돌려받을 수 없냐고 말했지만 학원측은 규정상 안 된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더 따지고 싶었지만 패배감에 떠밀려 빨리 나와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5개월 동안 대체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시덥잖은 그림 뭉텅이가 전부였다. 그리고 싶었던 로봇은 한 장도 그리지 못했고 스토리 기획 쪽은 아예  접근조차 못했다. 호기심으로 출발한 막연한 희망들은 스타트도 제대로 못 끊은 채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럼 나는 이제부터 뭘 해야 되지? 결국 취업을 해야 하나. 하지만 IMF 후유증으로 명문대 졸업생들도 취업에 물을 먹는 판국에 내가 어디를 들어갈 수 있을까.

     

차마 집에는 그만뒀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대낮부터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니던 어느 날. 사방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컴퓨터 학원들의 간판이 눈앞에 들어왔다. 김대중 정권하에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벤처 붐과 IT 열풍이 몰아닥치던 시절이었다. 그때 학원마다 걸려있는 ‘웹디자인’ 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잠자던 뇌에 스파크가 튀었다. 아, 애니메이션 학원에서도 배운 게 있었구나. 일러스트와 포토샾! 비록 애니메이터의 길은 좌절됐지만 웹디자인 쪽을 공략해보면 어찌어찌 취업은 가능하지 않을까? 웹디자이너는 수요도 많고 어차피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뭘 못하겠는가.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각오로 다시 한 번 학원의 문턱을 넘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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