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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Oct 30. 2023

애니메이터 (4화 웹마스터냐 웹디자인이냐)

99년 2월, 나는 마지막 학점을 채우고 졸업을 했다.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삐걱거린 학교생활은 마지막까지 씁쓸한 기억만 남긴 채 끝난 셈이었다. 졸업식도 가지 않았고 행복하지 못한 순간들을 빨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이제 본격적인 웹디자이너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강남의 인근 학원에서 상담을 받던 중 매니저가 뜻밖의 제안을 던졌다. 

“정보처리 기사 1급 자격증을 따셨네요. 혹시 웹마스터 쪽은 관심 없으신가요?” 

웹마스터 과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특별히 관심을 두진 않았다. 비록 애니메이터의 길은 실패했지만 이 카테고리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는 건 피하고 싶었다. 웹디자인이 그래도 뭔가 예술적인 아우라가 더 있었으니까. 하지만 매니저의 말이 많아질수록 저절로 두 귀가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적성으로 치자면 웹마스터가 더 맞지 않나? 전형적인 이과 형 인간답게 컴퓨터 프로그래밍 쪽을 파보면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지난 번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받았던 내상(이쪽 일이 XX씨에게는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고 싶지만 물음표가 많은 일과 잘할 것 같지만 좋아하지 않는 일 사이에서 결국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실패를 또 겪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도 뉴스 보셨죠? 지금 세계는 정보화 시대 아닙니까? IT 산업이 미래를 위한 살 길입니다.” 

“이번엔 진짜 잘할 자신 있나?”

“자신 있습니다. 저 자신 있다는 말 잘 안하는 거 아시잖아요.”

적어도 그때 자신 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과거 게임개발자나 애니메이터의 경우 막연한 동경만으로 시작했다면 이거야말로 꽤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웹마스탄지 뭔지 그거 수강료가 얼마라 그랬노?

나는 염치없지만 또 다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웹마스터 과정을 등록했다. 

     

커리큘럼은 윈도NT서버. HTML, ASP 등 컴퓨터와 웹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수업이었다. 특별히 열심히 한 것 같지 않은데도 차근차근 과정을 잘 따라갔다. 짐작한 대로 프로그래밍에 필요한 자질인 수학과 논리연산을 나는 꽤 잘했고 학원 내의 평가도 좋았다. 끝나면 바로 취업을 알선해 주겠다는 학원 측의 말도 빈말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 웹마스터 수업 자체에 흥미가 없었고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취업이 중요하다지만 이렇게 출발해버리고 나면 결국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기회를 영영 잃지 않을까. 

     

어느 날 실습 과제로 간단한 홈페이지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웹마스터 웹디자이너 과정 수강생 네 명이 한 팀을 이뤄 작업을 진행했다. 웹마스터 쪽은 생각보다 할 일이 많지 않았고 웹디자인 쪽들은 밤늦게까지 이미지 작업을 계속했다. 홈페이지는 마감을 넘기지 않고 완성되었고 시연까지 마쳤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홈페이지를 보면 볼수록 묘한 이질감이 생겼다. 암만 봐도 웹디자이너 쪽이 멋지고 화려해 보였다. 프로그래밍 코딩 소스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춰져 있어 그런지 이 홈페이지는 전혀 내 작품 같지 않았다. 반면 웹디자이너가 만든 형형색색의 이미지와 버튼들은 존재감을 확실히 뽐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고민과 성찰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처음부터 웹디자인을 하고 싶었어. 취업 마지노선으로 정한 새천년에는 정확히 6개월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래, 이젠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웹디자이너에 도전해보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웹마스터와 웹디자인을 다 할 줄 알면 오히려 금상첨화 아닌가. 나는 학원 측의 취업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서울 시내에 있는 유명하다는 웹디자인 학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얘기를 해보자면 다음해 첫 직장을 프로그래머로 시작했고 지금도 그 계통으로 밥 벌어먹으며 살고 있으니 결론적으로 웹마스터 과정을 수료한 건 도움이 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냉정히 말하자면 그때 학원에서 배웠던 기술 대부분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정작 업무에 필요한 것들은 회사에 입사한 뒤 처음부터 부딪혀가며 다시 배웠다. 학원에서 배운 프로그래밍보다 오히려 컴퓨터 포맷, 각종 드라이버 설치, 메모리 관리 같은 것들이 현실에서 더 실용적이었는데 정작 이런 건 집에서 독학으로 익힌 거라는 점이 아이러니했다. 그 시절 학원 유랑을 통해 깨달은 건 현실적 효용성과 거리가 먼 날림식 교육의 학원들이 대다수였다는 것이다. 수강생 숫자가 많고 유명한 곳이라 해도 특별히 나은 게 없었다. 요즘 같은 시대는 많은 정보들이 오픈되어 있어 교육기관의 질이 전반적으로 올라갔지만 당시만 해도 달콤한 홍보에 속아 돈을 상납하는 나 같은 호구들이 정말 많았다. 김대중 정부의 IT 집중 육성 정책 기조 방향은 옳았고 대한민국이 지금 같은 IT 강국이 되는데 초석을 다졌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명과 암이 있듯 IMF로 오갈 데 없는 젊은이들의 불안을 부추겨 줄줄이 IT 업계로 몰려들게 만들었던 부작용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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