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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Dec 13. 2023

프로그래머 (1화 페드로 마르티네스)

나는 뭘 해도 안 될 거라는 비관적인 마음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새천년의 막연한 희망 같은 건 끼어들 자리 없이 게으르고 우울한 나날이 반복되었다. 스물일곱. 아직 젊고 첫 취업을 하기 에도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의욕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내재된 우울감은 기다렸다는 듯 맨살을 드러냈고 불면증과 대인기피증이 심해졌다. 나는 고작 이십대 중반에 인생이 끝나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바깥을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날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지 멀쩡하면서 밥만 축내는 식충이. 너 같은 건 아무도 좋아해주지 않을 거야.

       

부모님의 잔소리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특별히 뭘 안 해도 좋으니 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밖에서 돈도 쓰고 사람도 만나라고. 하지만 집 밖을 벗어나기도 버거운 사람에게 그건 쉽지 않은 요구였다. 그즈음 나는 틈틈이 방에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썼다. 하지만 쓰기만 하고 정작 회사에 보내지는 않았다. 이력서 작성은 그냥 뭐라도 하고 있다는 요식 행위일 뿐 처음부터 보낼 의도 자체가 없었다는 게 맞았다. 이렇듯 몇 개월간 동굴에 박혀 있던 나를 꺼내 준 건 뜻밖에도 한 스포츠 선수였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도 맨발투혼 박세리도 아닌, 그는 바로 도미니칸 공화국 출신 메이저리거 페드로 마르티네스였다.     


그 시절 나의 일과는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 방에서 티비를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했다. 특히 야구 중계를 많이 봤는데 이때부터 MLB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전부터 박찬호 선발경기는 많이 봤지만 MLB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남아도는 오전에 AFKN 의 MLB 중계를 접하면서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들이 펼치는 플레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중 특히 보스턴 레드삭스의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에 완전히 꽂혀 그가 선발 등판하는 날은 MLB 문자 중계를 켜놓고 혼자 응원하며 환호했다.       

사실 페드로가 뛰어난 투수라는 사실은 전부터 대략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브 중계로 직접 본 그의 모습은 외계인이라는 별칭답게 센세이션했다. 모서리에 속속 꽂아 넣는 포심 패스트볼과 알고도 못 친다는 서클 체인지업에 MLB의 내로라하는 타자들이 헛방망이질을 하며 우수수 나가 떨어졌다. 특히 이 해의 활약은 백년이 넘는 MLB 역사를 통틀어도 탑이라 불릴만한 말도 안 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내가 정말 반한 건 마운드에서 뿜어내는 그의 포스였다. 180cm로 투수치고는 작은 체구지만 어디 칠 테면 쳐 보라는 자신감과 거만한 표정은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그때의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게 바로 그 자신감과 거만함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우울감이 걷히며 차츰차츰 본 모습을 되찾아갔다. 잃어버린 표정을 회복했고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들과의 대화가 늘었다. 그때 내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아버지가 당시 삼성을 다니고 있던 친척 아재에게 취업을 부탁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고 나는 고민 끝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재에게 일단 아무데나 넣어줄 수 없냐고 물었다. 아무데나. 그때의 나는 아무데나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긴 했다. 아재는 대강의 내 이력을 확인하더니 IT 개발 쪽으로 알아보겠다 답을 했고 며칠 후 바로 연락이 왔다. INS 코리아라는 삼성카드사의 협력업체이며 내 대학 졸업장과 정보처리 기사 자격증 정도면 무난하게 통과될 거라 했다.

     

다음날 평소 입을 리 없는 정장을 모처럼 빼입은 다음 회사를 찾아가 면접을 보았다. 협력업체라 본사 자체가 크지는 않았고 사장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넙적하고 호탕한 인상의 아저씨였다. 형식적인 질문을 몇 가지 주고받은 뒤 그는

- 자네는 취미가 뭔가?

- 야구 보는 걸 좋아합니다.

- 오~ 나도 야구 좋아하는데 혹시 어디 팬인가? 좋아하는 선수가 있나?

- 롯데 자이언츠 팬이고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제일 좋아합니다. 

- 페드로 마르티네스? 그게 누구지?

-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투수인데 지구상에서 가장 공을 잘 던지는 사람입니다. 아! 제 이메일 아이디도 PEDRO-MARTINEZ 입니다.

순간 쓸데없는 이야기를 내뱉은 것 같아 아차 싶었지만 사장은 예상 밖의 대답에 기분 좋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 언제부터 출근 가능한가?

- 내일이라도 당장 가능합니다.

- 다음 주 월요일부터 삼성카드 C/S 개발팀으로 출근하게. 위치와 전화번호는 데스크 직원이 알려줄 거고 앞으로 열심히 해보자고.

     

그렇게 나는 스물일곱 여름에 첫 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근무처가 상계동이라 수원 집에서 다니기엔 먼 것 같아 근처에 월셋방을 구했다. 티비와 컴퓨터 외에는 짐이랄 게 거의 없어 작은 방임에도 혼자 살 공간으로는 부족하지 않았다. 첫 출근 전날 밤 걱정과 두려움에 잠을 설쳤다. 겁이 났지만 지금은 없는 자신감도 짜내야만 했다. 그래, 페드로를 생각해. 페드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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