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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Dec 23. 2023

12월의 Summer Night

연극을 해 보겠다는 결심은 반쯤 충동적인 것이었지만 무대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동경은 있었다. 나에게 연극은 보통의 사람들처럼 어린 시절 학교나 종교단체에서 접해본 게 사실상 전부였다. 물론 20대 중반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잠깐 연극을 배웠고 작은 무대에도 서봤지만 그건 20년도 넘은 옛날 이야기였다. 가끔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보는 것과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기에 관심 자체를 접고 살았다. 그러다 중년이 되면서 버려뒀던 것에 대해 하나씩 눈길을 돌리게 되었는데 때마침 인근 평생 학습관에서 연극 과정 강좌가 떠 있는 걸 발견했다. 이런 지역 교육의 특성상 경험 없는 일반인들에게 문턱이 낮고 수강료도 거의 공짜나 다름없어 마침 시간적 여유도 있는 터라 일단 수강 신청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개강 날짜가 임박해오자 강좌를 취소할까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남들 앞에서 과장되게 나를 드러내는 모습을 상상하니 겁이 났고 잘하지 못할 거라는 걱정이 앞을 가로막았다. 취소 버튼 앞에서 망설이다 일단 첫 시간을 가본 뒤 가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수업 첫날 연습실을 가보니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는데 아마도 이전 기수부터 계속 함께 했던 것 같았다. 평소 낯을 가리고 관계 형성에 적잖은 예열이 필요한 스타일이라 심리적 위축감은 더 커졌다. 자연스레 수강취소에 더 무게감이 실렸고 오늘은 대충 시간만 때우다 가자 라고 결심했다.

      

연극 과정이니 기본적인 호흡과 발성 혹은 연극 이론에 관한 부분을 먼저 가르칠 줄 알았는데 첫 수업은 레크레이션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일종의 아이스 브레이킹인가? 간단한 자기소개와 몸풀기 게임을 마친 뒤 선생님은 프린트물 한 장을 나눠주었다. 2인 1조가 짝이 되어 백설 공주의 한 장면을 자유롭게 연기하라고 했다. 아니 첫날부터 부담스럽게 연기를 하라니! 일단 파트너와 함께 즉석에서 대략적인 구성을 짜고 대사를 맞추었다. 뭔가를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선생님은 우리를 앞으로 내몰았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연기를 했다. 결국 절반 이상 애드립이 되어버렸는데 놀라운 건 전혀 떨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잘했다는 박수와 함께 연극에 좋은 발성을 지녔다는 칭찬까지 들으니 기분이 우쭐해지고 막혀있던 가슴이 뻥 뚫리듯 후련했다. 그 순간 나는 수강취소 생각을 깊숙이 구겨 넣고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우리가 해야 할 공연은 뮤지컬 그리스의 한 대목으로 10분 남짓의 분량이었다. 시간이 짧고 대사도 적지만 뮤지컬의 특성상 안무를 병행해야 하는 점은 다소 부담스러웠다. 이 뻣뻣하기 짝이 없는 몸은 내가 잘 알지 않는가. 내가 맡은 역할은 주인공 대니의 친구 중 한 명인 로져.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면서 모기 같던 목소리는 조금씩 커졌다.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톤의 음성이 튀어나왔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동작이 몸을 반응시켰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았음에도 그동안 내 목과 몸은 얼마나 한정된 울타리 안에 갇혀 자유롭지 못했단 말인가. 비록 연기와 안무 모두 아직은 부자연스러움을 탈피하지 못했지만 연극을 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내 신경은 흥분했다.

   

수업 분위기는 매번 가볍고 유쾌했지만 공연 날짜가 임박해오면서 분위기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 리허설 겸 본무대에서 시연을 마친 다음 선생님은 평소와 다른 진지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엉망진창이에요. 연습 때는 잘하시더니 왜 무대에 서니까 이렇게 다들 굳어있고 자신감이 없는 거죠? 관객도 없는데 이러면 본공연에서 어떡하실 건가요. 

우리는 분명 평소처럼 한 것 같은데 선생님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하지만 동영상을 돌려보고 난 뒤 그 의미를 깨달았다. 연습 때 찍어뒀던 동영상이랑 텐션이 다르다는 걸 모두 눈치챘다. 무대가 생소한 사람들이 겪는 무의식적 공포가 잠재되어 있었던 거다. 나 같은 신입 기수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난 기수 역시 당시엔 코로나 때문에 무대에 서지 못해 본공연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 내가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무대를 즐기세요. 조금 실수하고 틀려도 괜찮아요. 무대는 여러분이 주인공이고 관객들 앞에서 자신감 있게만 하세요. 살면서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요?

     

12월 2일 오전 공연 당일. 우리는 연습실에서 마지막 합을 맞추고 무대분장까지 마쳤다. 연습실 문을 나서면서 함께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친 다음 공연장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관객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다. 그래, 지금은 우리의 시간이다. 우리는 틀림없이 잘 해낼 것이다. 마침내 조명이 켜지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무대로 나가는 순간 남아있던 긴장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고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대사할 때마다 배에 힘을 주었다. 연기 파트가 끝난 뒤 안무 파트인 Summer Night 의 전주가 이어졌다. 수십 번씩 듣고 맞춰봤던 안무였다. 엔딩 영상과 커튼콜까지 마친 뒤 우리는 무대를 내려왔다. 미세한 실수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자신감이 무대에서 표출되었고 우리가 만든 무대에 만족했다. 전문 배우나 일반 관객들 눈에서는 이 연기와 무대가 보잘것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다들 직장을 다니고 육아를 하면서 연극과 무관한 삶을 살았던 일반인들이다. 없는 시간을 짜내며 함께 연습하고 무대에 올랐던 순간들은 아무나 누리지 못할 호사스런 경험이었으리라. 선생님의 말과 달리 나는 이번이 마지막 무대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분명히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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