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솔로남이자 나는 솔로 애청자로서 이번 20기를 보는 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출연자들이 맘에 안 들어서라기보다 제작진과 나솔 유튜버들이 지나치게 빌런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20기는 학벌과 스펙 위주의 인물들로 구성된 소위 말해 모범생 특집의 밑밥을 깔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튀는 언행을 하거나 눈에 띄는 빌런이 적다. 프로그램의 절반이 지났음에도 빌런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상 정숙 한 명뿐이다. 하지만 정숙은 딱 봐도 인플루언서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모양새가 티 나는데 제작진 입장에서는 활용하기 좋은 템 하나를 확보한 셈이다. 가뜩이나 밋밋한 기수라 지난 정숙에게 방송분량을 몰방하고 있는데 도입부의 키스장면부터 시작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9기 광수처럼 특정 인물 한 둘에 분량을 몰아주는 케이스는 있었다. 하지만 9기 광수는 당시 욕을 많이 먹긴 했어도 프로그램의 취지에는 진심이었고 실제로 영숙과 결혼까지 이어졌다. 반면 이번 기수 정숙과 제작진은 대놓고 자극적 요소를 뽑아내려는 의도 때문에 뭔가 불편하고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많은 데이팅 프로그램 중 나솔을 꾸준히 시청하는 이유는 그나마 제작진의 개입이 적고 출연자들의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짝을 찾는 게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출연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초창기와 달리 현커와 결혼 커플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도 이에 대한 반증이다. 직전 기수인 모태솔로 특집의 경우 시청률이 높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봤다. 그건 의도하지 않은 본능적인 반응이 튀어나왔기 때문인데 영철의 트림, 광수의 눈물, 영식의 술주정은 결코 계획 하에 나올 수 없는 장면들이다. 모솔 특성상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비주얼과 고구마 같은 답답함 때문에 싫다는 분들도 많았지만 나솔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유튜브의 대다수 나솔 컨텐츠들 역시 조회수와 구독자를 확보하려고 MSG 잔뜩 뿌린 방송을 유도한다. 20기의 경우 영수는 학벌무새, 현숙은 가식녀, 광수는 양자역학 오타쿠로 만들어 버리는데 여지없이 좋아요 와 칭찬 댓글이 달린다. 어차피 다음 기수 등장하면 관심 밖이 될 한철 장사라 최대한 뽑아먹겠다는 의도 자체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납득할 만한 이유 때문에 욕을 먹는 게 아니라 욕할 대상을 정해놓고 이유를 만드는 방식은 여전히 맘에 안 든다. 사실 이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방송 화면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나머지는 해석의 여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일단 확증편향이 발동하기 시작하면 누구든 빌런으로 전략시킬 수 있다.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나쁜 게 아니라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므로 나쁜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편리하고 명확하며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준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기를 쓰고 선동과 편 가르기를 주도하는 게 아니겠는가.
학벌무새라고 욕먹고 있는 의사 영수가 만나는 사람마다 출신대학을 물어보는 게 일상에서는 예의 없는 행동이지만 솔로나라에서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는 사전 인터뷰 때 성실함의 척도로 학벌을 본다고 했으며 자신의 말 그대로 실천을 하고 있다. 5박6일이라는 짧은 시간, 그것도 초반에 어느 정도 노선을 확보하지 않으면 병풍으로 전략하기 십상이라 본인의 관심사에 집중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영수가 의사라는 직업과 비교적 괜찮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없는 건 다른 매력이 떨어져서이지 학벌무새라서 그런 게 아니다. 서울대 약대 출신 현숙이 가식적이며 잘난 척 한다고 욕을 먹는데 이 역시 삐뚤어진 질투심으로 밖에 안 보인다. 물론 딱 봐도 상대방이 마음에 없음에도 열심히 맞장구 쳐주고 자본주의적 미소를 날리는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질 수는 있다. 그럼 19기 정숙처럼 솔직하게 싫은 티를 내는 게 맞는 거란 말인가? 만일 그랬다면 건방지고 예의 없다, 서울대면 남들 무시해도 되냐는 식으로 욕을 더 먹었을 것이다. 광수의 경우 사전 인터뷰 때 여자가 울면 면박 줄 거다, 소개팅에서 양자역학 얘기를 했다는 등의 발언으로 미루어 볼 때 제작진이 정숙과 함께 빌런으로 점찍은 인상을 심어준다. 이들은 광수에게 괴짜 과학도 이미지를 기대했겠지만 내가 볼 때 방송의 절반이 진행된 시점에서 그는 생각보다 평범하고 멀쩡한 사람이었다. 자기세계에 지나치게 빠져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딱히 빌런이 될 만한 문제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뭐 썩 바람직한 행동이라 볼 순 없지만 나름 본인의 페널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나에게 괜찮게 비춰졌다.
어차피 나를 포함한 시청자 입장에서는 의도적 편집이 들어간 방송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의 숨겨진 면은 볼 수 없다. 가까운 지인들조차 속내를 모를 때가 많은데 고작 몇 시간 방송으로 어떻게 알겠는가. 이미 20기까지 진행된 시점에서 출연자들 역시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소비될 지 모를 리 없을 테고 그 정도 리스크를 떠안을 만큼 얻는 것이 있으니 출연을 결심했을 것이다. 그래도 모든 건 정도라는 게 있다. 제작진, 출연진, 시청자 모두 시청률, 인지도, 자극적 재미에 집착한다면 결국 프로그램의 한계를 드러내고 폐지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나는 조금 더 오래 나솔을 시청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