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훈과 성자의 마지막 이야기
영훈은 2006년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인 9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몸이 안 좋아졌고 몇 년 뒤 치매가 찾아왔다. 일종의 노환이었는데 평소 특별히 아픈 데가 없던 그였기에 다소 의외였다. 노인의 정신병을 치매라는 용어보다 노망이라는 속어로 쓰이던 때라 우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천성은 버릴 수 없는 듯 치매에 걸려도 평소처럼 조용했고 특별히 가족을 힘들게 할 만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성자에게는 예외였는데 영훈은 완전히 어린아이로 회귀한 듯 하루 종일 그녀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성자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며 안절부절 했다. 성자는 밀어닥친 현실을 담담이 받아들였고 10년이 넘는 돌봄의 과정을 수행하며 마지막까지 영훈과 함께 했다. 이전까지 나는 영훈은 성자 없이 못 살아도 성자는 영훈이 없어도 잘 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지켜보며 내 생각이 틀렸다고 느꼈다. 무쇠처럼 강해보이던 그녀도 수많은 세월을 함께 헤쳐 온 끈끈한 동반자 정서를 넘어설 만큼 단단하진 못했다. 영훈이 죽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그녀 역시 치매에 걸렸다.
성자는 영훈이 떠나고 8년 뒤인 2014년 이른 봄에 삶과 작별했다. 정신은 오락가락해도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 육체의 건강함은 비교적 오래 유지한 편이었다. 집안에 홀로 남은 그녀를 위해 부산과 울산에 거주하던 자식들이 번갈아가면서 돌보았다. 하지만 성자가 구십을 넘기고 그들도 하나 둘 노인이 되어가면서 돌봄의 한계를 인식했다. 결국 성자는 실버타운으로 보금자리를 옮겼고 몇 년 뒤 세상을 하직했다. 전해들은 바로는 거기서도 특유의 보스 기질을 발휘해 화통하게 돈도 잘 쓰고 인기도 많았다고 한다. 성자는 살아생전 누구보다 나의 결혼을 간절히 바랬다. 그 많은 손주들 중 유일하게 자기 가정을 이루지 못했기에 늘 안타까워했고 결국 죽는 날까지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관 속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그간 가지지 못했던 미안한 감정에 눈물이 났다. 영훈과 성자는 요셉과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어머니가 묻혀있는 양산의 천주교 공동묘지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두 분 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와 달리 신앙의 깊이는 얕았지만 처음 세례를 받았을 때 좋아하던 표정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돌이켜보면 두 사람과의 이별이 그렇게 극적이진 않았다. 대학 입학과 서울로의 이주 후 왕래는 드물어졌고 자연스레 관계도 소원해졌다. 졸업 후에는 취업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겹쳐 개인적으로 힘든 시절을 보냈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성장의 시기 때 많은 것을 의지했고 사실상 부모역할을 했던 분들이지만 서른이 넘은 시점에서 더 이상 이들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고 눈에서 멀어지자 마음도 멀어졌다. 어쨌거나 이들은 평균 수명 이상으로 장수하면서 감정의 무딤에 모자라지 않은 시간을 흘러 보낸 상태였다. 어떤 소중한 존재도 평생의 시간을 채워줄 순 없듯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의 영향력은 내 인생의 전반부에만 미친 셈이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존재했기에 나는 지금의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영훈과 성자는 특별한 어른도 아니고 대단한 걸 물려주지도 않았지만 그들이 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건 행운이었다. 그들의 손자였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받았고 하지 않거나 겪지 말아야 될 것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 역시 내가 손자라서 좋았을까? 죽은 사람 속내를 알 순 없지만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난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일방적 희생과 감사의 시간으로만 채워졌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서로에게 아깝지 않은 시간을 우리는 기꺼이 공유했다고 믿는다. 매년 명절 때면 영훈과 성자의 사진을 올려놓고 차례를 지낸다. 박제된 사진 속 두 사람의 얼굴은 변치 않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현실의 나는 점점 더 그들에게 가까이 가고 있다. 훗날 저승에서 재회하면 어린 시절 그때처럼 같이 화투 한 판 칠 수 있을까. 이왕이면 그때 그 모습으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