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의 이야기
주위에 보면 그런 사람이 있지 않는가. 우리 편이면 든든한데 상대편이면 짜증나고 밉살스런 타입. 성자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어디서든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이겨 먹으려고 덤볐다. 뭐 나 같은 손자 손녀들에게는 예외였지만. 심지어 치매에 걸려 실버타운에 가서도 아버지와 삼촌들의 말을 빌리자면
“걱정하지 마라. 니들 할머니 거기서도 대장 노릇하느라 바쁘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면서도 큰소리 빵빵 치고 밥도 잘 묵는다.”
중학생 때로 기억하는데 우리 집은 유선방송을 보고 있었다. 집에 티비는 3대인 반면 신청한 라인이 하나뿐이라 안방에서만 방송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영훈이 케이블 선을 끌어다 각 방의 티비에 연결을 시켜놓았고 이 정도는 영훈에게 캔 뚜껑 따는 것만큼 쉬운 작업이었다. 어느 날 유선방송 요금을 받으러 온 검수원이 이를 적발한 뒤 이런 식이면 돈을 더 내든가 당장 철거하라며 소리를 쳤다. 영훈이 죄송하다고 선을 철거하려 하자 성자가 대뜸 앞을 가로막았다.
“돈을 왜 더 내야 되는데? 이거 우리 할배가 다 한 거요.”
“보소. 여기는 테레비 하나만 쓰는 게 원칙입니다.”
“원칙? 대한민국 법이 와 그 모양이고. 저래 하면 니들 돈이 더 들어가나?”
“이 할마시 말이 안 통하네. 되도 안한 걸 우기고 난리야.”
그러자 성자는 방 안으로 검수원을 들어오게 하더니 발악적으로 티비에 연결된 유선 케이블을 뽑아버렸다.
“됐냐 이 자식아. 어데 젊은 놈이 늙은이 앞에서 되네 안 되네 주둥이를 씨부리쌌노. 아나 이거 다 가져가뿌라. 꼬우면 경찰서에 신고하던지. 니 가면 우린 또 테레비 볼 거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칠십 노인네가 두 눈 부릅뜨고 역정을 내니 검수원은 단숨에 목 꺾인 인형처럼 안 되요. 안 되는데.... 만 반복하다 결국 돌아갔다. 뭐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때는 이런 막무가내 스킬이 통하던 시대였다. 성자가 못 배우고 공부머리는 떨어져도 상황판단 능력은 뛰어난 사람이었다. 어떤 방식이 통할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나이가 깡패라는 장유유서를 바탕으로 성질부리기, 말 끊어내기, 눈물짜내기 등과 같은 스킬들을 적절히 잘 활용했다.
성자의 이런 행동거지를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녀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한편으론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대에서 생존하려면 누군가는 독해져야 하고 그 역할을 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걸 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훈은 선하고 성실한 사람이지만 거친 세상을 헤쳐가기엔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적어도 그녀는 가족 문제에서만큼은 늘 앞에 나서서 악역을 자처했다. 비록 그 방법이 옳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 적도 많지만 그녀의 악다구니와 이기심이 물렁한 가정의 버팀목이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형과 나에게는 늘 기를 펼 수 있게 만드는 듬직한 지원군이었다. 꼬맹이 시절 우리는 야구를 하다가 남의 집 유리창을 깨먹었다. 그 집 아주머니가 화가 나서 형과 나를 세워놓고 당장 엄마를 불러오라며 호통을 쳤다. 곧바로 형이 달려가 성자를 데려왔는데 왜 엄마 대신 할머니가 왔냐고 하자
“애들 엄마는 어데 가고 없으니 나한테 얘기하소. 애들이 놀다 보면 유리도 깰 수 있는 거지, 어른이 되가지고 이래 애를 벌세워놓고 야단을 쳐! 유리 값 당장 물어줄 테니까 니들은 얼른 집에 가거라!”
이후에도 종종 유리창을 깨뜨리면서 아버지를 한숨 짓게 했지만 그 시절 동네에서 원없이 야구를 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은 유년의 행복했던 기억이었다.
문득 성자에 관한 웃픈 에피소드 하나를 얘기하자면 영훈이 죽고 상을 치르던 자리였다. 전국에서 본 적도 없는 친척들까지 다 모여들어 그녀를 위로하며 안타까워했다. 칠십 여년을 함께 했던 동반자를 잃은 구십 노인 성자는 연신 눈물을 훔쳐가며 어린아이처럼 영훈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상황만 놓고 보면 농담이 끼어들기 힘든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간만에 본 친척들과 재회하면서 마음이 점차 안정된 성자는 특유의 수다 기질이 재발했고 사람들 앞에서 이들의 불편한 과거를 태연하게 떠벌리기 시작했다.
“니 요즘은 계집질 안 하재? 야가 옛날에 그렇게 마누라 속을 안 썩였나”
“아이고, 니 노름은 끊었나? 노름 그거 손대면 큰일 난다”
“니는 어릴 때 영 반푼이 같더만 아들래미는 우째 저리 공부를 잘할까. 신기하다 신기해”
바람피고 도박하고 머리 나쁜 게 자랑은 아니지만 이건 뭐 공개처형도 아니고 난데없이 팩트 폭격을 맞은 당사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상주 앞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억지로 허허거리기는 모양새에 나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확실히 그녀는 재미난 구석이 많았다. 영훈이 은은하고 차분한 무채색이라면 성자는 총천연색을 지닌 사람이었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성자에 대한 추억 거리가 넘치는 게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