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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스피커 Dec 10. 2021

새댁이가 헌 댁 되려면 걸리는 시간 2

두 여자 이야기

한정식집의 사장님은 우리가 함께 우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 틀림없다. 음식 그릇들을 치우고 매실차와 과일 후식이 나온 후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는데도 우리 곁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역시 비싼데라 그런 것인가.

눈치도 안 주고 센스가 최고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간신히 눈물을 그친 동서와 나는 식당 옆에 마련된 한쪽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따끈한 커피가 속을 타고 내려오면서 18년 동안의 눈물을 밖으로 내어놓느라 건조하고 퍼석해진 우리 두 사람을 촉촉하고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동서는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 말을 이어갔다.     


"민준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어머님이 양수리 집으로 데려가셔서 거의 키우다시피 하셨어요. 제가 그때 일도 그만둔 상태라 충분히 키울 수 있었는데 저를 못 믿으셔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저와 상의도 없었고요."     

"내가 좀 데리고 있으마. 애가 비염이 심해 잠도 못 자고 잘 먹지도 못하잖니. 애 꼴이 이게 뭐냐. 아버지랑 내가 데리고 갈 테니 주말에나 와라."     


그렇게 시작된 어머니의 반 강탈 양육 주도권은 쉽게 동서에게로 다시 넘어오지 않았다. 주말에 아이를 보러 가도 "애는 놓고 가지 그러냐" 어김없이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동서는 "아니에요. 어머님. 제가 데리고 가야지요." 하고 쉽게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민준이가 저와 사이가 안 좋고 사춘기를 지독하게 앓는 것은 거의 6살 때까지 주 양육자가 엄마인 제가 아니고 할머니였고 자꾸 집과 할머니 집을 왔다갔다한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민준이는 엄마인 저를 잘 따르지 않았어요. 저는 아이가 집에 오면 아무래도 할머니보다는 단호하고 엄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뿐이 아니에요. 어머님은 모든 것이 트집이셨어요. 제 피부가 까무잡잡하다고 그것도 싫다고 하셨고요. 한 번은 지나가는 스님이, 저 때문에 남편이 사는 게 힘들어진다는 소리를 했다는데 그때는 저보고 헤어지라고 까지 한 적이 있으세요. 믿어져요? 언니?"     


나는 하마터면 그 동네 스님이라는 사람에게 욕이 튀어나올뻔했다.

그나저나 동서는 어느새 나를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 나는 정말 몰랐다. 현실보다 오히려 리얼한 것도 아니라는 평을 들었던 리얼 드라마 '사랑과 전쟁' 같은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우리 부부는 지난번 글에서도 밝혔듯이 결혼을 한 이후 부모님을 정기적으로 찾아뵙고 용돈도 드리면서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부모님이 더 이상 선을 넘어 간섭하지 못하시도록 매사 단호한 태도를 취했었다. 이때 남편의 역할이 컸다. 나는 겁도 많았지만 남편이 잡은 방향이 앞으로 건강한 우리 가정을 세워나가는데 옳다고 믿었고, 믿음직한 남편 뒤에 모르는 척 숨어서 나는 상냥함을 유지하고 착한 역할을 맡았다. 당연히 남은 악역은 남편이 했고. 어머님도 마음을 내려놓으셨는지 언젠가부터 우리 부부에게는 별 간섭도 관심도 없으셨다. 우리에게도 1년 뒤 아들이 생겼지만 단 한 번도 맡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늘 강 같은 평화가 유지되었었을까?


난 우습게도 내심 동서 부부가 부러웠던 적이 많았다. 시부모님이 우리 가족만 빼고 동서네와 놀러를 다니는 정황이 자주 포착되었고 무언가 내가 모르는 일들이 점점 늘어갔다. 동서는 사랑받는데 나는 왕따를 당하는 것 같아서 질투를 느꼈고 부러웠다.

결혼 후에도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맏며느리가 된 것 같은 마음의 상처가 종종 나를 휘감을 때면 죄 없는(?) 남편에게 화도 내고 서러워 울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알고는 있었다.     

내가 시어머니라도 시부모님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라면 반대 없이 그대로 따르고, 매사에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동서가 더 편하고 예쁘셨겠지.

그런데 18년이 지나고 알게 된 사실은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나에게 온통 소외감을 안겨주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 동서가 지금

내 앞에서, 사는 동안 형님인 내가 제일 부러웠었다고 말하며 울고 있었다. 동서의 남편 즉 서방님은 한 번도 자신의 방패가 제대로 되어준 적이 없었단다. 골백번도 더 헤어지려고 했지만 참았다고 했다.

     

"야 네가 정신 차리고 네 와이프 지켜. 어머니 말만 듣지 말고"


나의 남편이 동생에게 그렇게 말한 그날 이후에 서방님의 태도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살기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18년 동안 어머님께 툭하면 불려 다니며 온갖 잔 심부름을 해야 했고 마치 종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는 동서의 말에 가슴이 찢어졌다.

사실  그날 나는 동서에게 비싸고 맛있는 밥을 사주며...


"동서 내가 말이야 그동안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고 부러웠었는지 모르지" 라고 속 이야기도 하고

이제 우리끼리 재미있게 지내자며 털어버리려고 했었는데.....


나는 그날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6시간 동안 울며 읍소하기를 반복하는 동서를 달래며 함께 울어 준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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