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스피커 Dec 05. 2021

새댁이가 헌 댁 되려면 걸리는 시간은 1

일주일 만에 새댁이 헌 댁 되었네

동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뜻하지 않게 계속되는 상태를 말하는 '하염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분명하다.

18년 동안 할 수 없었던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낸 직후였다. 나도 함께 울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서가 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나는 조금 더 숨죽여 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문득 시계를 보았다. 내 눈을 의심했다. 6시간이 지나있었다.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20분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신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른 지 일주일쯤 지난 후인 2017년 어느 따스한 봄날 점심시간이었다. 한 살 많은 형님인 나는 가장 고생한 우리 둘이서 회포라도 풀자며 동서를 불러냈다. 동네에서 제일 비싸고 세련된 한정식집을 신경 써서 예약하며 혹시 숫기 없는 동서가 어색해서 거절할까 봐

약간 긴장도 했었던 것 같다. 결혼한 지 18년 만에 처음으로 동서와 단 둘이서만 밖에서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왜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일까?

우리 두 사람은 왜 매사에 그리도 조심스럽고 또 늘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일까?

당연히 서로 한 번도 속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동서는 나의 전화 한 통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왔고 맛있게 밥을 먹은 후 지금, 내 앞에서 한 없이 우는 중이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결혼하라고 하신다고? 에잇 농담이죠?"     


"농담 아니에요.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하시네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는데 나, 지금?"     


내 귀를 의심하며 내가 재차 묻자 그 남자는 말했다.     


"문영 씨도 알다시피 동생네 커플이 연애한 지가 7년이에요”


존댓말을 쓰는 남자와 거의 반말인 여자. 우리는 당시 연애 4년 차였다.     


“실은 자기가 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는데 부모님이 동생네 결혼을 반대하셔서 미루고 기다리다가 회사 앞에서 동거한 지 좀 됐거든요. 그런데 임신을 했네요. 아마 일부러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아 그랬구나. 우리 커플만 결혼반대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니. 거기다가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를 단행하고 임신까지 했다니 순간 뇌가 포즈를 누른 듯 멍해졌다.

뭐야 이거. 의문의 1패인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기분이 찜찜했다.


이 이야기의 상황 전개는 이러하다. 동생네 커플이 임신한 것을 아신 부모님은 할 수 없이 당장 결혼을 하라고 통보하셨고, 우리 집안에 형보다 동생이 먼저 결혼하는 법은 없으니 우리 보고 먼저 결혼을 하되 일주일 후 바로 동생네가 식을 올리도록 결혼 날짜를 잡으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나름의 긴 시간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숱한 위기를 만났지만 결혼 허락을 기다려왔는데 폭풍같이 결혼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왠지 밀려서 결혼하는 당시의 기분이 허무하고 유쾌하지 않았지만 우리 커플은 가장 적절한 때에 결혼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 간격으로 차례대로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한 집안의 두 며느리가 되었다.  

그래도 동서는 어쨌든 결혼 전에 미혼인(?) 몸으로 참석했지만 나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트렁크를 풀기도 전에 한복으로 갈아입고 형님이라는 존재로 변신한 후 헐레벌떡 동서의 결혼식 미사에 뛰어갔다.

결혼식장에는 바로 지난주에 만났었던 똑같은 친척들이 같은 옷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는 정장과 한복을 입고 여기저기 서 있었다. 속으로 끅끅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옷도 드라이도 못하고 그대로 걸어놨다가 입고들 오셨겠지?'

철없던 1주일 차 새댁은 이 상황에 오히려 조금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관전도 잠깐. 식이 진행되자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이 갑작스레 몰려왔다.

그것은 서러움. 약간의 슬픔.

그래. 그런 단어들 말고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놀라 울컥거리다가 결국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남몰래 닦고야 말았다.

동서도 나도 그때 막 2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었다. 응원받고 축복받아야 할 귀한 가정의 출발이, 이렇게 억지로 허락을 받아내고 해치우듯 결혼식을 해야만 하다니. 우리의 속수무책이었던 20대가 속상했다.     


'우리는 4년이었지만 이 커플은 무려 7년 동안이나 시부모님의 상처를 받아 삼키고 위기도 얼마나 많이 겪었을까. 지켜진 사랑이 기특하다. 저렇게 부부가 되었네. 대견하다.'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서네 커플에게 말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혼잣말을 눈물과 함께 삼켰다.     


"어머 안됐다 얘. 일주일 만에 새댁이 헌 댁 되었네"

..........     


동서의 결혼 미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마주친 남편의 작은 어머님이 던진 말이었다. 앗 가슴 한편에 돌멩이가 되어 드르륵드르륵 맴도는 느낌.

'그러게요 호호' 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넘겼지만 일주일 만에 새신부가 들어와 나는 헌 댁이 되었다는 말이 또 서럽기 그지없었다. 왠지 이 집안에서의 나의 정체성이 계속 그렇게 정의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지금까지도 그 말이 잊히지 않는 것을 보면 꽤나 인상적인 상처였던 것 같다. 안 해도 되는 말은 하지 말고 살자고 결심하기도 했던, 말의 기억이었다.     


이글은 저의 브런치북에 실려있었지만 나만의 오디오 '나디오앱'에 연재될 오디오에세이 '우리 이혼 안했어요'를 위한 정리글입니다. 예전에 읽으신 분들은 참고해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이혼 안 한 이유, 세 번째 원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