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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스피커 Dec 13. 2021

우리 재산 다 너네 것 아니냐1

부러움이 종료되었습니다.

아는 후배가 있다. 수줍음을 잘 타는 그녀는 키는 배우 전지현과 같고 역시 상당한 미인이다. 그녀의 시아버님은 탄탄한 중소기업의 CEO였다가 은퇴하신 분이다. 한 동네에 후배 부부의 신혼집을 마련해주셨고 매주 토요일 4형제가 함께 모여 부모님과 아침식사를 늘 함께 한다. 드라마에서 그룹 회장님들이 빛나는 샹젤리제 아래에 커다란 식탁 가운데에 앉아있고 자식들을 빙 둘러 앉히고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 번뜩 떠오른다.

한 발자국 뒤 사이사이에는 식사 시중을 드는 주방 스텝들이 있고 자식들은 아버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이게 제 철이니 이것 먼저 드셔 보세요. 하는 그런 장면 말이다.

아 후배는 그 정도는 아니고 식사는 시어머님과 며느리들이 돌아가면서 차리거나 가끔 고급 호텔에서 조식을 먹는다고 한다. 결혼 후 15년 동안 주말이면 한 번도 빠짐없이 그리한다고.


"야 힘들지 않아? 한 달에 한두 번도 아니고 매주 꼬박꼬박 시부모님과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는 거? 토요일 아침이면 애들도 좀 더 자고 싶을 거고 너도 남편도 피곤할 텐데"     


"아니 안 힘들어요. 나는 친정에서 화목하게 자라지 못해서 그런지 매주 불러서 맛있는 거 먹여 주시고 손주들도 보여드리고 좋아."  

   

'........ 친정에서 화목하게 자라지 못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나는 시댁에서 조차도 환영받지 못하는 결혼을 했는데 정말 부럽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매번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대신 "오 그렇구나. 네가 그렇다면 좋네 좋아. 너네 시댁 형제 부부들이 그리 매주 모인다니 정말 의가 좋구나"라고 했다. 며느리로서 힘들지 않냐고 말을 꺼낸 나만 그냥 이기적인 자가 되고 말자.    

 

"그리고 있잖아요 선배, 만날 때마다 항상 나에게도 애들한테도 용돈도 두둑이 챙겨 주시니까 그것도 좋았지요."     


"(아 그럼 그렇지!)” 이건 속으로 한 말이었다. 너네 시부모님 매너 최고이시다. 우리는 식사도 사드리고 용돈까지 드리고 오는데 차원이 다르구나. 진짜 부럽다!"     


"아 또 있어요. 헤어지기 전에는 우리 집 일주일치 먹을 장도 봐주시는데"     


졌다. 진짜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들 며느리와 함께 장을 보며 시어머니가 계산도 척척해주시곤 하셨다니.

그 말까지 들었을 때 나는 잠시지만 위가 찌릿할 정도로 부. 러. . 다.     


하지만 쏙쏙 이어지는 후배의 말들은  내 귓가에 누군가가 "부러움이 종료되었습니다"라는 자동 지원 멘트를 틀어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내 생각을 바꾸어 주었다. 일단 수시로 했다는 말씀.


"나중에 우리 재산 다 너네 것 아니냐"


이 불편한 말씀은 참으로 찝찝하게 느껴진다.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나중'이라는 말로 자식들의 효도를 조종하려는 듯한 약간의 저의가 느껴지는 말이라서 그랬다.     

나의 후배는 결혼 전부터 들어왔던 시부모님의 이 말이 은근히 든든하고 결혼을 결심할 때도 영향을 주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럼 그럼. 물론이지. 가난해서 부담백배인 시댁보다는 부자 시댁이 낫지. 뭐 말해 뭘 하나.

후배의 남편은 결혼 후 몇 차례 자신의 벤처회사를 창업하며 불안정한 수입이 계속 이어졌다.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며 수시로 빠듯해지는 살림에, 시부모님의 현 재력과 미래에 대한 힘 있는 약속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리라. 나라도 그런 환경이 주어졌다면 시부모님과 여러모로 공조체계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상상해본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단순한 생각이었다.

나의 후배는 결혼 후 시댁 앞에 늘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되어갔고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날까 봐 애를 많이 썼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후배의 시부모님은 수시로 손주들의 성적을, 입시결과를 때로는 아이들의 인성까지도 들먹여가며 비교했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이 며느리의 능력에 달린 것처럼 말씀하시니 늘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긴장을 안고 살았다고. 경제적으로 지원을 받는 입장이니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나의 후배가 남편과의 사이가 한창 좋지 않아 울며 버티던 시절, 그 일을 알게 된 시부모님이 후배에게 '헤어져라'라고 단호히 말했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은 것도 토요일 늘 함께하는 조식 자리에서였다고.

그때 느꼈단다. 딸처럼 아껴주신 것이 아니라 그냥 재정적으로 능력 있는 남편의 부모,

그냥 시. 부. 모였던 것일 뿐.     


나도 나를 딸처럼 여겨주는 다정한 시부모님을 만나 사랑받고 싶었다. 4년간의 결혼 반대는 내게 상처의 흔적을 남겼고 애교 많던 나는 결혼 후 시부모님 앞에서 점점 말이 없어져갔다. 어떤 말을 해봐야 그 말이 꼬투리가 되어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오기 일쑤였으니까.

우리 시부모님은 결혼 후 당연한 듯 우리에게 매달 용돈을 넣으라고 하셨다. 도리를 다하자란 마음으로 매달 자동이체로 용돈을 드렸다. 다른 자식들이 하는 것처럼 뵐 때마다 맛있는 식사도 사드렸다. 시부모님이 미국 형님이 있는 곳으로 이민을 간다고 하셨을 때 두 아들의 돌반지들을 팔아서 선물도 사드리고 길고 긴 편지도 썼던 기억이 난다.

당시 진심을 표현한 것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때는 왜 그리도 아이처럼 전전긍긍 잘 보이려고 했을까 싶다. 난 그저 사랑받고 싶었던 것이다. 모든 세상이 '사람의 마음' 하나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사는 극감성주의자인 나는 며느리 생일도 한번 안 챙겨주시는 차가운 시부모님이 늘 섭섭하고 야속했다.

하지만 내겐 이 모든것을 상쇄할만한 것이 있었다. 부모님의 선을 넘는 간섭엔 단호하고, 나에 대한 사랑은 갈수록 지극 남편이 있었기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 살 수 있었다고 믿는다.     



우리 재산 다 너네 것 아니냐는 다음 편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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