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스피커 Oct 21. 2022

플랜 B의 삶을 사는 제주 친구

난 한 달 살기 넌 제주도민

10월. 사람들은 이맘때면 종종'이제 지쳤다'

라고 한다.

봄은 시작하는 에너지를 받아 용기백배로 살았고

뜨거운 여름에는 아직 열정이 살아 있다며 힘을 냈다.

그런데 어느덧 찬 기운이 돌며 이성적 지각에 눈을 뜨는 가을이 되었다.

가을을 즐기겠다는 안빈낙도의 마음보다는 왠지 초조하고 자꾸 불안해진다.

남은 한해의 날 수가 이제 겨우 71일(현재 기준).

하루로 치면 밤 10시쯤에 해당되는 시간.

오늘 하루도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고 아무런 성과 없이 또 한 날이 저물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 시간대의 감정과 닮았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역시 '책 읽기'가 진리라며 흩뜨러 진 정신줄을 다림질하기 위해 가을 독서를 시작하기도 하고 한 해동안 건강을 돌보지 않았다는 새삼스러운 반성을 하면서 퇴근 후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기도 한다.

나? 나의 선택은 마치 아무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혼자만의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동안 경주하듯 바삐 달리느라 놓치고 또 놓치고. 안타깝게도 만나지 못했던 것들을 이참에 다 만나 볼 계획인데 일단 그 일차 대상은 '나'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나는 지금 제주도 나홀로 한달살기중이다.


일상의 여유로움과 여행의 설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낯선 곳에서의 '한 달 살기'

2022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이맘때. 10월.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제주에 얹어본다.

이미 10월이니까, 아직 10월이니까.


제주 나 홀로 한 달 살기의 딱 반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2년 전, 40대 남편이 직장을 퇴사한 후 과감히 수도권살이를 접고 훌훌 제주도로 떠나왔던 친구가 숙소로 찾아왔다.

제주의 세찬 바람이 여전한 날이었지만 그래도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심장을 벅차게 나대게 하던 날이었다. 서귀포에 사는 그 친구는 동쪽 월정리에 있는 나에게 꼬박 한 시간을 달려 해안도로를 미끄러지듯이 찾아왔다. 반가웠다. 2년 만의 해후에 들뜬 것도 사실이지만 나 홀로 제주 한 달 살기 중 근 2주 만에 나를 아는 사람과의 첫 만남이라니 괜히 설렜다.

또한 운전이 지겨워 제주에서 '뚜벅이 살기'를 하는 중인데 모처럼 친구의 차를 타고 버스로는 갈 수 없었던 곳에 가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는 함덕으로 가는 해안도로 끝에 자리한 에메랄드빛 바다 앞 카페 명소를 찾았다. 우도 땅콩 라테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고. 우리는 땅콩 라테 두 잔 보다 더 고소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할망들처럼 떠들어댔다.

서로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먼저 내가 호기심이 가득 묻은 진성의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길어야 1년쯤 살고 다시 서울로 올 줄 알았어. 너네 가족이 이렇게 제주에 정착하기로 한 것이 놀라워. 막상 살면 어려움을 느끼고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제주에 적응하고 살아낼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거야? 행복해? "


친구는 대답을 하기 전데 여기보다 땅콩 라테를 더 잘하는 집을 소개해주겠다고 장담을 한 후에 말을 이어갔다.


" 그건 아마도... 사람들을 만나서인 것 같아. 제주에 오면서 남편과 서로 약속을 했지. 우리끼리만 문을 닫고 살지 말자고. 제주에 사는 사람들을 가급적이면 많이 만나자고 말이야. 누가 건너 건너 소개라도 해주면 빈말로 하지 않고 꼭 약속을 잡았고 만남을 가졌어. 만나면 그 다음번엔 꼭 우리 집에 초대를 했지. 그렇게 우리 집에도 사람들이  빈번히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면서 제주의 삶이 진짜 좋아지기 시작하더라고. 그리고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있으니까 여기가 내가 살던 경기도인지 제주인지 분간이 안될 때도 있어. 호호. 나는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 같아. 하하하. 참 얼마 전부터는 제주 '쿠팡'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데 거기서 사귄 사람들과 우리 집에서 독서모임도 시작했어. 너무들 좋아하더라고."


그러네. 이 친구는 경기도에 살 때나 이곳 제주에서나, 삶의 라이프 스타일 또는 태도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하던 대로, 살던 대로, 그녀의 특기인 음식을 장만해서 사람들을 초대하고 좋아하는 독서모임도 열었다.

사는 곳이 어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만의 삶을 사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친구는 현재 삶의 터전이 동경하던 아름다운 제주라서 더 좋다고 했다.


그동안 이 친구 집 이층 다락방에는 2년 동안 총 400여 명의 사람들이 제주여행을 와서 머물다가 갔다고 한다. (400명이라고? 그녀의 지인들과 지인들의 지인들까지 다 합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저런. 말도 안 돼. 흉내도 못 낼일.)

그녀는 제주에 와서 인생의 소명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제주. 그러한 제주에 여행을 온 사람들의 여유 있고 행복한 얼굴 그리고 무장해제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매일 보는 것이 즐겁단다. 작은 친절도 고마워하며 쉽게 마음을 열고 서로의 을 나눌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게스트하우스를 짓기 위해 돈과 빚을 보태서 제주에 땅을 샀다고 한다. 땅을 사고 보니 집을 지을 돈은 부족해서 돈을 마련하는 중이라고. 쿠팡도 그래서 다니는 것일까?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정작 그녀는 무척이나 고무되고 즐거워 보였다. 사람들을 환하고 그들의 영혼을 맛있고 풍성한 음식과 정으로 채워주는 일에 자신이 상당한 소질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하지 않는가. 잘 될 것 같았다. 저렇게 좋아하는 일을 찾고 열정을 다하는 모습이라니. 중년을 넘긴 나이에. 한 없이 용기롭고 멋져 보였다.


"... 사람들에게 꼭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이 플랜 B의 삶도 있다고 말이야. "

올해 스물 두 살 된 그녀의 둘째 아들은 자의로 대학에 일부러 진학하지 않았고 굿즈 크리에이터로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고 있다. 자신의 삶에 확신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고 살맛 나는 일이다.


친구와 함덕 바다 앞에서 보석같이 부서지는 하얀 파도와 끝없이 파란 하늘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비치 앞에 있던 플립 마켓에서 파는

손으로 깎아 만든 천연 나무 향초 세트를 선물했다. 너의 아름다운 제주의 집에 나의 기운도 더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아 나는 제주 한 달 살기 중이다.

나그네로 지내는 여행지에서 오랜 친구와의 조우는 한 달 살기의 매력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신이 나서 나도 모르게 자꾸 목에서 헛소리와 삑사리 음이 나왔다. 영혼이 즐거웠음에 틀림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