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지만 그 때문은 아니었고 이 마을의 유일한 대학생인 스무 살 태진이와 연애를 시작하고부터 그랬다.
인근 지방도시의 대학교를 다니던 태진이가 집에 내려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도지사인
큰 아버지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명령이니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큰 아버지와 함께 밥상을 마주한 후 재빠르게 집으로 돌아와, 정미소 직원들 50여 명의 눈을 요리조리 피해서 집에 있는 지프차를 타고 몰래 빠져나왔다. 종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순영이를 태우기 위해서다. 순영이는 벌써 두어 시간 전부터 아버지의 이발소 앞을 조용히 빠져나와서 마을 어귀에 연신 발을 동동 구르며 서있었다.
소문은 발이 없고 빨랐다. 순영과 태진이의 연애는 온 마을을 휘감아 돌아 양쪽 집에 알려졌고
서로 같은 이유로 거세게 반대하는 중이었다.
두 집안이 너무 기운다는 이유로 말이다.
특히 태진의 아버지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절대 안 돼'를 외친 후 말도 꺼낼 가치조차 없다는듯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 태진의 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 대학생의 마음을 홀라당 빼앗은 순영이도 같은 마음이었다.
순영이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하나뿐인 이발사다. 일을 안할때는 늘 빽 구두를 신고 다녀서 동네에서 빽구두 장씨으로 통한다.
순영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시저녁이 되면 저녁밥도 안 드시고 새 하얀 구두를 꺼내 신고는 어딘가로 바삐 갔다. 그렇게 나가 새벽이 지나야 술에 잔뜩 취해 돌아왔고 온 동네가 떠나갈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어차피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깰 잠 아예 자지 말아야지' 순영이는 밤새 태진 오빠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곤 했다. 한글을 다 익히지 못해 맞는 글자보다 틀린 글자가 더 많았지만.
오늘은 태진 오빠가 드디어 방학을 해서 오기로 한 날이었다. 아버지가 나가기를 숨죽이며 기다렸다가 바로 태진을 만나러 집을 빠져나왔다. 뒤통수에서 어머니의 짜증과 외로움이 뒤섞인 한숨소리가 들렸지만 모른척했다. 아니 더 이상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순영이는 태진 오빠를 따라서 어디든 가고 싶었다. 멀수록 좋았다. 그것이 오늘이면 더 좋겠다. 이 집에서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14살 그리고 20살의 순영과 태진은, 60년 전 겨울 전라도의 한 작은 마을의 이슈의 중심에 서 있었다. 마을에서 최고로 예뻤다던 순영이와 유일한 대학생 태진이는 나의 시부모님(가명)이다.
물론 하나도 틀림없는 실화다. 남편의 증언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대충 들어도 일일 드라마 같다고 생각했던 시부모님의 연애스토리는 들을 때마다 재미났다. 두 분은 수많은 밤 도망을 도모하다가 결국 22살의 젊은 나의 시아버님이 군대의 통신병으로 있던 시절, 급기야 16살의 어머니를 데리고 부대 앞에 막사를 짓고 함께 사셨단다. (세상에 이런 일이. 와우)
휴가나 외출 시에 부대 앞 막사에 있는 어린 아내에게 왔다가 늦지 않게 부대에 복귀하기 위해서 지름길이었던 내장산 절벽을 기어오르셨다는 일화는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었다. 아 불같은 사랑의 화신이었던 두 분.
이 두 분의 말릴 수 없던 사랑에도 불구하고 양쪽 집안의 반대는 계속되었고 두 딸을 낳을 때까지도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셋째인 나의 남편 즉 아들을 얻게 되자 그제야 그 무섭던 아버님이 직접 찾아오셨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 시어머님은 드디어 정미소 부잣집 셋째 며느리가 된 것이다.
1995년 4월 봄.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나의 남자 친구는 한국 제일의 치기공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당시 유일하게 한 명만 뽑는 고대 안암병원 기공연구소에 취직했지만 정작 본인은 매일 반복되는 기공 일에 갈증을 느꼈다. 전문직으로 미래가 보장된다는 말만 듣고 뛰어든 공부고 일이었지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다. 연구소에 있으면 갑갑증이 일어나 하루에도 몇 번씩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한다. 설상가상 살면서 처음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났는데(그게 나다) 부모님의 극심한 결혼 반대는 갈수록 강도가 더해갔고 거기다가 여자 친구는(역시 나) 툭하면 헤어지자고 했다.
여러 스트레스와 심리적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던 차에 중국에서 사업을 하시던 작은 아버지가 중국으로 그를 불렀다. 중국 대학에서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언어 공부도 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나중에 자신의 사업을 함께 하자는 감사한 제안까지 하면서. 일단 1년만 가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하고 갈 수는 없었다. 기다려달라고 했다. 여자 친구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중국은 멀지 않은 곳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나오겠다며.
그 말을 나는 믿지 않았고 열심히 한 눈을 팔았다.
그런데 하늘은 믿음 없는 자가 아니고 믿음 있는 자를 돕는 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코피를 쏟으며 중국인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뿐 아니라 한 달에 한번 정말! 나를 보러 나왔다. 문제가 되었던 여비는 작은 아버지에게 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비행기의 반값인 훼리를 타고 내가 있는 부산 직장 앞까지 찾아왔다. 산동성 연태에서 비행기로 4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돈이 없어 16시간이나 걸리는 배에 올라 기어코 내 앞에 나타난 이 남자 뭐지. 무섭다. 이 남자와 결혼해야겠다. 이만큼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구나.
따이공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곡물이나 공산품 등을 되팔아 이윤을 남기는 전문 보따리상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말로는 '대신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편은 한 달에 한번 나를 보러 나올 때 '따이공 일'을 하며 내게로 오는 뱃값을 만들었다고 했다. (찾아보니 코로나전까지 따이공들이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며 소규모 무역에 기여했는데 코로나 이후에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엄연히 말하면 불법이지만 이것이 유일한 수입인 사람들을 정부차원에서 막을 수 없고 경제교류에도 이바지하는 부분이 있어서 묵인한다고 한다 -위키백과-)
따이공일도 여의치 않을 때는 당시 유학시절에 만난 중국 선교사님이 돈을 대주어 나오기도 했다고. 그렇게 하늘까지(?) 도와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고 부산 서울 장거리 연애를, 한국 중국 간의 국제연애를 해내고 부모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결혼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단 하루만 볼 수 있다면, 유학생 신분에 험한(?) 따이공이 되는것도 마다않고 여비를 마련해서, 16시간이나 걸려 배를 타고 찾아오는 정열적인 사랑꾼. 아마 그것은 60여 년 전 밤새 가파른 내장산을 기어올랐던 그 밤의 그분이 물려준 세기의 사랑꾼의 피였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에필로그
4년 전에 시어머님이 그리고 작년에는 시아버님이 암으로 돌아가셨다. 여기까지 쓰고는
여러 감정들이 한꺼번에 왈칵 눈물과 함께 차올라서 잠시 글을 멈춰야만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왜 이런 아프다면 아픈 이야기들을 애써 글로 내어놓는 중인 걸까'를 말이다.
불꽃같은 사랑을 하고 평생 의가 좋으셨던 두 분은 자식들이 보기에도 참 좋았다. 부모님의 안정된 관계와 부부의 따뜻한 사랑의 분위기 속에 자란 나의 남편은 온유한 성품에 반듯하게 커서 내게로 왔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두 분은 남편을 포함해서 4남매의 어떤 결혼도 찬성한 적 없이 격렬히 반대하셨고 당신의 며느리나 사위들을 끝까지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여 보듬어 주지는 못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아버님은 자신의 생애의 남은 3년 동안 며느리 생일을 챙겨 밥을 사주셨다.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는 눈치가 보여하지 못했던 일이셨으리라. 돌아가시기 전
세 번 사주신 생일밥.
세 번의 사랑,
세 번의 사과였던 것일까.
다시 울고 싶어 졌다. 남편이 다가와 글을 쓰다 멈추고 얼굴을 감싸쥔 나를 안아주며 토닥였다.
생전에 시부모님은 TV를 보다가도 아픈 아동이나 불우한 이웃들이 나오면 마음이 아파서 초조해지셔서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셨다. 눈물을 흘리시면서 거의 매번 전화기를 들고 후원금을 보내고나서야 안정이 되셨다.
그런 시부모님의 모습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했다.
하지만 슬프고도 아이러니하게도
두 분 다 이토록 고운 마음결을 가졌는데 왜 그렇게 며느리들에게만은 인색하고 높은 잣대를 가지고 계셨을까.
마음속의 상처가 인격을 이길 만큼 그토록 힘이 셌던 것일까. 시집살이도 해본 사람이 시킨다는 말은 왜 틀리지 않았을까.
결혼반대와 마음의 시집살이를 겪은 나도 상처 입은 자가 되었다. 시부모님을 모두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는 이 글과 함께 두 분과 처음으로 오롯이 마주하고 앉은 기분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냥 써봐.' 내가 내게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보세요.어머님은 생전에 우리와 함께 보낸 마지막 날 테라스가 예쁜 저희 집에 오셔서 '아 좋다 정말 좋다 잘했네'라고 하셨지요.
집장만이 처음이었던 우리는 그 말씀이 또 얼마나 좋던지요. 어머님의 의식 있는 마지막을 그렇게 밝고 환한 얼굴로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께서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후에도 3년 동안 매주 두 세 번씩 추모관을 찾아가 꽃을 두고 오셨던 사랑꾼 아버님. 지난 3년 간 저희 두 며느리에게도 최선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의 아들을 제게 선물로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나중에 두 며느리를 보게 되겠지요. 두 아들은 이 다음에 결혼만은 꼭 하고 싶다고 하니까요. 그 말만으로도 저희 부부는 재미나게 잘 살고 있다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좋습니다.
그런 미래가 정말 현실로 제게 찾아오면요
상처는 더 이상 리필하지 않겠습니다.
첫째 저의 상처를 뛰어넘는 큰 사랑의 그릇을 열어 그들을 보듬어 안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도 선입견 없이, 흐르니까 흐르는 저 강물처럼후회 없을 사랑을 흘려보내주겠습니다.
둘째 두 아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주체적인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어떤 간섭도 하지 않겠습니다.
세째 남이 못 보는 것도 볼 줄 아는 시인의 눈으로
작은장점도 찾아내어 기필코 만날 때마다 소리 내어 칭찬하고 격려하겠습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저희 부부가 자식들만 바라보며 일희일비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공부하고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이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열심히 살겠습니다.
항상 우리 부부가 공부하고 계속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두 아들에게 물려줄 돈은 여전히 없을 것 같네요.농담 반 진담 가득 입니다. "
이글은 저와 후대를 위해 그리고 상처를 다시 리필하지 않기위해서 썼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나의 글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