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단상1. 마지막 출근일

by 해돌

오늘은 이 회사에서 마지막 출근일입니다.

오늘의 심정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으로 남겨 두려고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이른 아침의 맑고 총명한 의식이 약간 사그라든 것 같아서 아쉽지만,

이렇게 막 글을 쓰고 싶게 올라왔던 일말의 감정도 흐릿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덤덤하게 글을 남깁니다.




솔직히 지금도 내가 퇴사를 한다는 사실이 아주 실감이 나지는 않습니다.

아침 출근길은 너무도 익숙했고, 내 방의 모습도 평소와 그대로였습니다.

왠지 그 익숙해져버린 느낌 자체를 지워야 할 것 같아서, 출근하자마자 괜히 주변에 보이는 짐들을 하나씩 치웠습니다.

이삿짐처럼 어수선하게 어질러 놓고서, 나는 이제 떠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다시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곳을 떠나면 다 신기루처럼 잊혀질 것 같아서, 하나씩 구체적으로 적어봅니다.




내 방은 너무 멋진 곳에 있습니다.

아침이면 창으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옵니다.

그 햇살이 좋아서 나는 한참이고 창 앞에서 서있곤 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있습니다. (오늘은 쌀쌀하지만, 날씨가 맑고 화창합니다. 이 글을 쓰는 사이에 햇살이 지나가버릴까 아쉬워 합니다.)


창 밖으로는 광화문광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미국대사관과 성조기가 정면으로 보입니다.

역사박물관 건물에 붙은 전광판에서는 재미있는 미디어아트가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세종문화회관과 그 사잇길도 보이는데, 이 길로 지나는 사람들과 차들을 보는 것도 재밌습니다.


다른 방들과 다르게, 내 방 앞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원래 있던 사람이 나가면서 자리가 비었는데, 그 공백도 좋았습니다.

내 방 가까이에는 복합기가 있어서 쉽게 프린트를 할 수 있었고,

탕비실도 지척에 있어서 수시로 그 곳을 드나들며 물을 마셨습니다.


방 안의 가구들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무 책상과 책장은 색감이 따뜻하고, 시디즈 의자는 편했습니다.

나는 빈 의자 한 개를 골라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비스듬히 걸쳐두고, 옆에는 잎이 둥근 고무나무 한 그루를 두었습니다.

고무나무는 햇살을 먹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랐고, 눈부신 초록빛 자태로 싱싱하게 방 안을 비춰주었습니다.




이제는 초년생의 고생을 지나왔고, 하는 일들도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적응되었고, 내가 어떻든(부족하든, 누군가로부터 욕을 먹든) 내 캐릭터가 대충 형성되고 각인되었습니다.

매일 같이 밥을 먹는 편하고 듬직한 친구도 있고, 식후에 늘 산책하는 길도 있었습니다.

안정되고 평화로운 나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퇴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저조차도, 내가 왜 퇴사를 결심하였나 싶어, 뒤늦게 아쉬움과 후회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무미건조하고 냉정한 퇴사 절차들을 밟으며 약간의 슬픔을 느낀 것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곳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 곳에서의 생활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갈수록 제 설 자리가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큰 존재감 없이 대충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도 있어 보였지만,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앞서나가고 싶다거나 비굴해지기 싫어서가 아니라, 주어진 자리를 보전하려고 항상 전전긍긍하고 쪼그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게 답답하고 싫었습니다.


또 직장으로서는 대체로 만족스러운 생활과 환경이었지만,

그야말로 일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서 나를 돌보는 데는 소홀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허겁지겁 음식을 밀어넣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심신을 달랬습니다.

몸은 갈수록 야위어가고, 정신도 급한 업무에만 신경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퇴근길에는 멍해진 상태였고, 자주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내 삶이라고 더 특별해야할 이유는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내가 소위 '갓생'을 사는 사람이라서, 나의 성장과 변화도 추구하면서 직장생활까지 해낼 수 있어서 자기 효능감이 높았다면 퇴사를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잠깐 멈추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저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만큼이나마 버틴 것도 스스로 대견하고 장합니다.


한편으로, 큰 조직이 주는 효능감, 든든함은 무형의 혜택입니다.

나오려는 처지가 되고 보니 그게 정말 크게 느껴집니다.

이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배부른 고민이고 섣부른 선택이라고 지적할 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버티고 또 버텼어야 했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 회사에서 쫓겨나더라도,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할 문제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도 존재합니다. 한 살 한 살 더 나이가 들수록 나는 약해지고, 더 도전에 취약해지고, 변화하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어차피 할 거면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글을 쓰고 보니, 대체로 만족하는 직장을 제발로 나온 것에 대해서

스스로 거듭 해명하고 반박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만큼 나 자신도 많이 고민하고 흔들리고

미래를 두려워하고 불안했음을 자각합니다.


기왕 퇴사한 김에, 나는 나를 잘 돌보고 가꾸고 싶습니다.

버티면서 쇠약해지는 내가 아니라, 나날이 강하고 굳건한 내가 될 것입니다.

조직원으로 길들여진 나를 깨부수고, 어디에서나 홀로설 수 있는 당당한 내가 되고자 합니다.

누군가에게 맞추는 둥글둥글한 내가 아니라, 자기표현을 잘하는 내가 될 겁니다.

불필요한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내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나가고 성취하는 나를 응원할 겁니다.


퇴사 이후의 이야기들을 계속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