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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이야기 1

영화 ‘밀양’을 통해 본 용서이야기

  김 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용서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확하게는 용서에 실패한 이야기이다. 용서를 시도했으나, 그것도 어린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는 신혜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혜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난 뒤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어린 아들과 함께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피아노학원을 하면서 생활한다. 그리고 귀향 중 자신의 고장 난 자동차 수리를 맡아준, 그녀에게 이성적 호감을 가진 정비소 사장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지역사회에 그런대로 적응해 나간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준은 유치원에 잘 다니고 있다. 무난하게 생활하던 중 그녀는 어느 날 그녀의 아들 준이 다니는 유치원의 자모회의 회식자리에서 좋은 땅을 보러다닌다고 자랑을 한다. 땅을 좀 살거라고. 이 자리에서 유치원 원장은 그녀에게 무슨 부탁이 있는 듯 보였는데 아마도 돈을 빌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듯 하다. 넓은 땅을 사려고하는 신혜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 후 지역여자들이랑 어울려서 노래방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집에 온 신혜는 아들 준이 없어졌음을 알았다. 노래방에서 통화하면서 엄마 곧 갈테니 놀고있으라고 했는데 말이다. 당황한 그녀는 온 집을 헤집고 다니면서 아들을 찾았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낯선 전화를 받으니 아들을 데리고 있으며 아들을 찾으려면 돈을 가져오라고 협박한다.

  신혜는 벌벌 떨면서 아들을 바꿔주기를 요구하나 괴한은 돈을 가져와야 아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신혜는 정비소 사장을 찾아간다. 그러나 정비소에서 노래방기기를 틀어놓고 혼자 노래부르며 즐기고 있는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체념하듯 돌아선다. 

  새벽을 꼬박 보내고 다음날 은행에서 돈을 찾은 그녀는 차를 몰고 범인이 지목한 장소로 가서 범인이 얘기한 대로 공공 쓰레기통에 돈을 넣는다. 범인은 여전히 아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니 다시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돈이 적다는 추궁이었다. 그녀는 돈은 그것이 전부이고 남편사망 보험금은 피아노학원 인테리어하고 집구하는데 다 썻다고 했다. 사실은 땅살 돈이 없으면서 있어보이려고 땅산다고 소문을 냈노라고도 했다. 

  결국 아들은 살해되었고 범인은 잡혔다. 

그 후 극도의 상실감으로 울지도 못하고 엄청난 고통을 겪던 신혜는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라는 기독교 종교집회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오열을 한다. 그리고는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음을 믿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전에는 가슴이 아팠는데 이제는 안 아프다고 하면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한다. 물론 정비소 사장도 신혜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며 신혜 곁을 지킨다.

  그러나 아들 준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고 피아노 학원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이를 준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길거리에서 전도도 하는 등 돈독한 신앙심을 가지게 된 신혜는 그로 인해 행복해 한다. 

  그렇게 어느정도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찾아가던 그녀는 같은 교회다니는 교인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이 있는 교도소에 면회를 가겠다고 말한다. 죄인을 용서해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용서한다고 말해주고 하나님 사랑을 전하겠다고 밝게 말한다. 그녀는 주위의 우려와 만류에도 주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며 교도소면회를 강행한다. 

  그리고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과 함께 정비소 사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교도소로 향한다. 이윽고 교도소에 도착한 신혜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 죽인, 아들의 유치원 원장을 면회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전에는 몰랐던 하나님 사랑을 알게 되었고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찾아왔노라고 말한다. 

  죄인은 고맙다고 하며 자신도 교도소에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오셔서 그 앞에서 회개를 하니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해주셨다 고도 한다.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노라고 하루하루가 평안하다고, 평안하고 환한 얼굴로 밝게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용서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아 평안을 누리고 있는 가증스러운 죄인을 본 신혜는 충격을 받고 면회를 마친 뒤 밖으로 나와 실신해버린다. 그리고 안정을 위해 병원에 며칠 입원하게 된다. 

  퇴원해서 구역예배에 참석한, 이미 마음이 닫힌 신혜는 구역식구들에게 나는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느냐? 왜? 라며 신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그리고 지렁이같은 사소한 것에도 화들짝 놀라 떨며 그런 자신이 비참해 통곡을 한다.

  그 뒤 신혜의 정서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행동이 시작 된다. 음반가게에 들어가서 음반을 도둑질 한 뒤 목사가 설교하는 야외집회에서 생뚱맞은 노래(대중음악인 거짓말이야!)를 몰래 틀어놓기도 하고 카센터 사장에게 애초 지킬 마음이 없는 약속을 하기도 하고 자신을 전도하고 함께 구역예배를 보는 교회장로를 성적으로 유혹하기도 하는 등... 이러한 행동을 통해 자신이 용서하기 전에 유괴범을 먼저 용서한 신을 모욕하고 신에게 대항한다. 

  급기야는 과도로 자해를 하고는 마침내 주위에 의해서 병원에 입원된다. 그 후 카센터 사장의 따뜻한 배려속에 퇴원을 하고 집에 돌아온 신혜는 정서적으로 어느정도 회복이 된 듯하다. 영화의 제목 밀양이 암시하듯 버려진 듯한 귀퉁이에도 따사한 햇볕이 스며드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결국 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신혜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 죽인 가해자를 용서하는데 실패한다. 그녀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가해자를 용서하겠다는 ‘결정의 용서’를 한다. 그 또한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지만 이 어려운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녀가 종교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용서를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기독교의 종교를 가짐으로써 가능했다. 믿음으로 자신의 상처가 어느 정도 싸매어지자 믿게 된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급했다. 가해자에게 용서를 선물처럼 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의 아픔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다. 즉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 보고 인정하고 상실을 아파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재빠르게 자신의 아픔을 종교의 위로로 덮어버렸다. 그리고 자신마저 속은 거짓기쁨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종교적인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기 전에 그녀는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상실한 것들을 애통해 해야 했었다. 고름을 짜내듯이 충분히 울고 또 울어야 했었다. 아픔을 말하고 말해야 했었다. 섣부른 공감과 인지적 재해석을 하기 전에 자신의 상처부터 치유했어야 했다. 대충 덮어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상처를 애써 못본 척 하고 종교적인 위로로 덮어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믿게 된 종교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자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용서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러나 결정한 다음에는 용서과정을 거쳐야 한다. 용서하기로 결정한 것이 용서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결정이 곧 용서라고 믿고 용서를 선물로 주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갔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고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평안한 얼굴로 말하는 가해자를 보는 순간 그동안 덮어두었던 상처가 폭발한 것이다. 

  여기서 용서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물음이 올라올 수도 있다.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사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신이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보면 신혜가 분노한 것은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인데 하나님이 용서해버려서 분노한다. 즉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면서 분노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하나 그러나 심리적으로 볼 때 그것은 하나의 촉매역할을 한 것이다.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촉매역할을 해서 폭발한 것이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인한 분노가 신에게 향한 것이다. 마치 내가 용서해야 할 가해자를 신이 용서해서 화가 난 것처럼.

  그러나 기실 신혜가 분노한 것은 가해자가 평안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용서를 받지 않은 이상 죄책감으로 찌그러져서 고통가운데 있어야 하는데 신의 용서를 받고 평안을 누리고 있으니... 나는 내 상처를 종교적 위로로 살짝 덮었을 뿐 아직 이렇게 아픈데 가해자인 당사자는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하면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으니 분노가 치솟고 그것이 신에게로 향한 것이다. 

  만약 신혜가 성급하게 상처를 덮지 않고 악행을 기억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낱낱이 맛보고 가해자와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내고 그 가운데 인지적변화로 인해 공감하고 인지적 재해석을 하고 자신의 경험을 통합하고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용서과정을 거친 다음 교도소를 찾아갔다면 즉 진정한 용서를 하고 난 뒤 교도소를 찾아갔다면 그녀는 가해자가 하나님을 믿고 평안을 누리는 것을 보고 그토록 참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말의 씀쓰레함은 있었을지언정. 

  성급한 용서였다. 필자는 신혜가 사건을 겪고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즉 애도기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역예배에 참석해서 밝게 웃는, 그리고 아파 신음하는 소리가 아닌 밝은 표정으로 긍정적인 말들을 쏟아내는 영화 속 장면이 너무나 아프게, 두렵게 느껴졌다. 심리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정리해버리고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도소방문이후 크게 터졌다. 


  이렇듯 ‘용서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용서했다고 믿으면 성급한 용서이다. 용서하겠다고 결정했으면 그 뒤 용서과정을 거쳐야 한다. ‘용서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용서과정을 밟겠다는 뜻이 되어야 한다. 용서과정을 밟아야 온전히 용서가 된다. 용서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재발한다. 용서는 용서하겠다고 결정한 뒤 용서과정을 밟아서 하는 것이다. 보통 분명히 용서했는데 다시 분노와 미움이 올라오는 것은 용서하겠다고 결정한 것을 용서가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정은 용서의 시작에 불과하다. 용서과정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신혜가 종교의 힘으로 용서하겠다고 결정했으면 그때부터 용서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교도소 방문은 용서 과정이 다 끝난 뒤 갔어야 했다. 상처를 아파하며 충분히 애도하는 용서과정을 밟지 않은 신혜는 상처를 치유할 길이 없었다. 단지 종교적 위로로 살짝 덮어두었을 뿐. 

덮어둔 상처는 반드시 그리고 크게 폭발한다. 교도소 방문이후의 신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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