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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이야기 3

용서, 꼭 해야 하나?

   나에게 심하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생각하면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상처로 인해 겪은 고통은 생각조차하기 끔찍하다. 이런데다 누군가가 용서를 들먹이게 되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마저 원수처럼 느껴진다. 용서라니??? 어떻게 감히 용서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가 뭘 안다고? 내 고통의 만분지 일이라도 알기나 하는가? 하는 마음에 증오심이 인다. 


  심하게 상처를 받은 사람이 이렇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 옳다. 그리고 반드시 분노해야 한다. 분노함으로써 내가 그런 상처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타에게 말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나의 자아존중감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분노를 지속적으로 장기간 가지게 되면 나에게 엄청난 해악을 미친다는 것이다. 일시적인 분노는 꼭 필요하다. 그러나 장기적인 분노를 품게 되면 차츰 나는 상처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 감옥은 나의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새끼를 잃은 어미 곰처럼 상처를 받고 으르릉거리며 내 삶을 좀먹게 한다. 분노의 감옥에 갇혀서 아름다운 세상을 살지도, 현재를 누리지도 못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심리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심하게는 대인공포증이 생길 수도 있다. 또 늘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혀 현재를 놓칠 수도 있다. 지금 여기를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현재의 삶마저 놓치고 결과적으로 망치다니...


  그래서 분노를 증폭시키며 계속 키우는 것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선택이다. 신체적으로 외상을 입어 피를 흘리면 빨리 응급처치를 하는 것처럼 심리적으로 상처를 입고 마음에 피를 철철 흘리면 빨리 싸매어주어야 한다. 계속 분노하면서 상처를 마냥 키울 수는 없다. 더 이상 상처가 진전되지 않도록 무언가 조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이 ‘용서’이다. 계속해서 분노에 분노가 꼬리를 물고 발생하면서 서서히 감옥이 형성되려고 할 때 재빠르게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 용서하자!” 라고. 그러면 적어도 상처의 감옥은 만들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용서를 선택한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싸매어야 한다. 분노가 더 진전되지 않도록...그런 뒤 치료해야 한다. 싸매지 않으면 피를 너무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의 감옥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고 상처를 계속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응급처치 없이 그대로 오랫동안 방치해두면서 분노하고 아파하면 그 상처에 평생 매일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잊기도 하지만 문득문득 생각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묵은 상처가 될 수 있다. 방치해둔 상처는 해결되지 않은 채 무의식속으로 들어가 나를 형성하고 내 성격의 지뢰밭이 된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누군가 이 지뢰밭을 살짝 건드리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온다. 그러나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지 이유조차 모를 때가 허다하다. 이미 상처의 감옥이 형성되어 있고 나는 그 감옥에 수인처럼 갇혀있는 것이다. 무의식속에 깊이 매몰되어 있는 것은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깊은 자기성찰이나 오랜 상담, 정신분석으로 찾아낼 수밖에 없다.  


  한편 무의식속에 매몰되지 않고 의식 속에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깊은 상처라면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고교시절 왕따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소화하지 못하고 분노를 증폭시키면서 상처의 감옥 속에 자신을 가둔 한 젊은이는 삼십대를 대인공포로 시달리며 세월을 보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들을 미워하는 만큼 상처받은 자신도 미워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경멸하고 미워하면서 그는 더 단단히 상처의 감옥안에서 칩거했다. 도무지 세상으로 나올 용기가 없었다. 불안으로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버티었다. 감옥에서 나오는 문으로 용서를 선택하고 나서야 그는 그 왕따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을 용서하는 문제가 남았다. 그동안 스스로를 못나게 여겨 자신을 너무나 증오하고 미워했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 선택으로 자신을 용서하는 길을 택했다.


  용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상처를 준 상대가 잘못이지 상처받은 나는 잘못이 없다. 가해자에게 상처받은 것도 억울하고 분한데 나까지 나를 상처의 감옥에 가두면서 상처를 주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다. 용서를 선택해 가해자로 인해 손상받은 자아존중 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용서과정을 거친 바른 용서가 자아존중 감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아존중 감을 회복하기 어렵다. 자아존중감이 심하게 상처를 입은 상태라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된다. 이것이 상처의 감옥이다. 


  용서는 가해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용서는 죄를 면제해주는 사면과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용서한다고 해서 가해자의 죄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나를 상처의 감옥에 가두지 않겠다는 결정이다. 상처받은 나의 자아존중감을 회복하겠다는 결정이다. 더 나아가서 이 상처의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해 성장하겠다는 선택이다. 즉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다. 가해자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용서는 약자가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강한 자만이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 용서가 약자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덮어두고 잊어버리고 문제 삼 지 않는 것을 용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건 용서가 아니다. 용서처럼 보이지만 전혀 해결된 것이 없다. 그저 덮어두었을 뿐이다. 그리고는 용서란 단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완전한 해결을 볼 때 용서라고 말할 수 있다. 


  용서는 꼭 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한다. 조지 허버트는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지나가야할 다리를 파괴하는 사람과 같다고 했다. 다리가 파괴되면 건너갈 수가 없다.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이후의 세계로 건너갈 수가 없다. 상처 입은 그 상황에 묶여있어야 한다. 상처로 인해 자아존중감이 훼손되어 자신을 미워하면서 심하게는 증오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용서하면 상처에서 풀려나서 상처이후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 용서가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받기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신을 만나고 삶이 깊어질 것이다.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자기가 건너가야 할 다리를 파괴해버려 그 다음 삶으로 나아가지 못한채 십수년 간 상처의 감옥에서 고통가운데 딩굴든 그 젊은이는 너무나 오랜시간 삶을 낭비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실오라기같은 희망으로 용서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상처의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했고 그리고 성공해서 이렇게 말한다. 스멀스멀 행복감이 올라온다고...신기하다고...이제 수년간 먹던 정신과 약을 끊어도 될거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리고 다음 단계로 자기용서를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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