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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이야기 4

누구를 용서하나?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한다. 깊고 깊은 상처를 받아서 어쩔 바를 모를 때 선택할 수 있는 자기사랑법이 용서이다. 상처받은 자신에게 자신이 또다시 깊은 상처를 주기 전에 용서를 선택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의 감옥에 갇혀 살지 않도록  용서해야 한다. 받은 상처로 인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을 거 같은 사람을 용서한다. 어린 시절 사랑을 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학대한 부모가 용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나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준 그 누군가가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를 상처의 감옥에 가둔 사람을 용서한다. 그가 용서의 대상이다. 그래야만 내가 상처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 외에는 상처의 감옥에서 나올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용서가 감옥의 키이다. 용서란 상처치유의 다른 말이다. 용서란 죄를 사해주는 사면이 아니다.


  어린 시절 끊임없이 엄마로부터 정서적 학대를 경험한 그녀는 사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성격장애로 고통을 심하게 겪고 있다. 지금도 그녀는 십년이 넘게 상담을 받으면서 자신을 힘겹게 세워나가고 있다. 자주 올라오는 자살의 충동을 다스리면서. 엄마는 그녀가 매사에 못마땅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강요했다. 도저히 타고난 성품으로 살지 못하게 닦달을 했다. 아이는 이유도 모르고 맞기도 하면서 신경질적인 엄마를 인내해야만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초중등 시절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또래들에게 맞고 지낸 또 다른 그녀는 자신을 때린 또래들에게도 화가 나지만 그보다는 맞고 지낸 자신이 더 미웠다. 그래서 자신을 증오하고 자신을 쓰레기취급을 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경멸하고 증오해온 그녀가 용서할 대상은 그녀 자신이다.


  가까운 친척에게 사춘기 때 성추행을 당한 또 다른 그녀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삭이면서 사춘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 분노와 상처는 소화되지 않은 채 자신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매사에 화를 내고 또 때로는 멍하게 T.V만을 보면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낭비했다. 


    군대를 갔는데 고참이 툭하면 불러서 외진 곳에서 구타하는 등 폭력을 가했다. 당시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던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심하게 상처를 입고 사람을 피하고 사람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대하고 변변한 직장에 취업도 못한 채 알바를 전전하고 있다.     


  다섯 자매의 셋째 딸인 그녀는 아빠가 자신을 비롯해서 자신의 여형제들을 모두 성추행내지는 성폭행을 한 사실을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자신은 비교적 가볍게 어릴 때 일회적으로 성추행을 당해서 성추행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자매들의 경험을 들으면서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아빠와는 한 집에서 살 수가 없다. 얼굴을 대면하는 것 조차 끔찍하게 싫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실을 알면서 그녀의 자아존중감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렇게 큰 상처를 받으면 우리는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어쩔수 없이 분노와 아픔 속에서 딩굴게 된다. 상처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반추하면서 점점 더 수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기가 건너가야 할 다리를 부수고 상처의 자리에 똬리를 튼다. 일생 그 상처와 분노를 품고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다. 


  따라서 용서할 대상은 나를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상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원수같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즉 깊고 깊은 상처를 받아 지속적으로 관계를 할 수 없는 그런 대상을 용서하는 것이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하는 한 방법으로 용서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상처를 받으며 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일상에서 쉽게 상처를 받고 주는 일은 나를 상처의 감옥에 가두지는 않는다. 내가 잘못한 면도 있고 해서 웬만하면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된다. 그래서 굳이 용서의 과정을 거칠 것도 없이 나의 마음을 좀 관대하게 가짐으로써 혹은 나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극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내 영혼에 깊이 패인 상처는 극복이 안 된다. 이 상처가 발목을 잡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게 한다. 나를 정신적 불구자로 만들고 나를 감옥에 가둔다.


  이럴 때는 상처를 치유해야만 한다. 상처를 치유하면 회복될 수 있다. 우리의 신체에 상처가 났을 때 치료하면 회복된다.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두는 사람은 없다. 만약에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몸이 크게 상할 것이다. 조기에 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상처를 방치해두면 최악의 경우 불구가 될 수도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조기에 치료해야 한다. 치료하면 된다. 그런데 치료할 생각을 안 한다. 아니 치료할 생각을 못한다. 몸과 달리 치료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치료방법이 있다. 용서다. 이제껏 붙들고 있던 그 증오스러운 가해자를 용서해서 놓아버리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용서를 선택하고 용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하여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대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용서할 대상은 나에게 견디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주고 나를 상처의 감옥에 가둔 가해자이다. 그가 내가 용서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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