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사는 것과 바지런히 사는 것은 같은가?
' 하마트면 열심히 살뻔 했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이 재미있어서 손에 들었는데 제목만큼이나 유익했다. 한마디로 힘을 들이고 긴장하고 애써고 집착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책을 읽고, 아니 책을 읽기 전에도 나역시 열심히 사는 것은 버리기로 했다. 대신에 바지런히 살기로 했다. 삶은 소중하기에...허투로 살고 싶지 않기에....
열심히 사는 것과 바지런히 사는 것!
같은 말아닌가? 그러나 나는 다르게 사용한다. 나는 열심히 살 생각은 없지만 바지런히는 살고 싶다. 삶이 좋아서다. 매일 주어지는 오늘이라는 좋은 삶을 누리고 싶어서다. 하루에 누리고 싶은 일들이 많아서다. 누리고 싶은 많은 것들을 다 누리려면 바지런해야 한다. 시간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바지런함은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힘들지 않으면 왠만해선 다섯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알람을 맞추고 자지는 않는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게으름 피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기 때문에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것은 몸을 배려해주기 위해서다. 일어날 시간을 정해놓고 시간에 몸을 맞추기보다는 몸에 시간을 맞춘다고 해야 할까.
암튼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그래도 바지런한 마음이 여섯시 전후로 일어나게 만든다. 물론 전날 저녁 일찍 잔다. 그렇게 해서 몸이 잘 만큼 자고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그러면 하루를 누리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일어난다. 이렇게 바지런할 수 있는 원동력은 열심히 사는 것을 내려놓은데서 나왔다. 말장난 같지만 그렇다.
'하마트면 열심히 살뻔 했다'의 저자처럼 나에게도 열심히 산다는 것은 뭔가 목표를 가지고 이루기 위해서 또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고 집착하는 것이다. 당연히 스트레스도 따르고 심한 부담감도 느낀다. 지나치게 목적지향적으로 몸과 마음과 삶에 온통 힘이 들어간다. 순간을 누릴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다. 길이 곧 목적지라 생각하고 그저 일상에서 해야 할 일들, 하고자 하는 일들을 즐기면서 순간을 누리면서 살고 싶은 것이 내가 원하는것인데 말이다.
내게 즐거움을 주는 행위는 내가 하고 싶은 소소한것들이다.
시골에서 살고 있으므로 새벽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시골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새벽기운을 마음껏 오래도록 즐기거나 기도를 하는 것,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를 만끽하는 것, 글을 한편 쓰는 것, 오후에 만보걷기 명상을 하는 것,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를 보는 것, 음악을 듣는 것, 저녁을 준비해 곁님과 함께 도란도란 소박한 밥상을 대하는 것, 이런 것들이 내가 하루에 하고 싶은 일들이고 하고 있는 일들이다. 특별히 나의 업인 상담이나 코칭, 강의가 없으면 이 일을 매일 반복적으로 하며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별것도 아니다. 그저 소소한 일상이다. 이 일상을 하면서 성장하고 내 영혼이 자유로워지기 바란다.
이렇듯 즐거움을 주는 행위를 하루 중에 좀더 많이 누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벌려면 바지런해야만 한다. 아침에 늦잠자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하루 중에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일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고 와칭하는 일이다.
살고 싶은 삶의 방향이 분명한지라 내가 살고 싶은 삶, 살고자하는 삶을 위해서 꾸준히 기도하고 소망하고 그 삶을 와칭하는 것으로써 열심히 사는 것을 대신한다.
나는 힘을 빼고 우주에 힘을 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바지런히 산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좋아하는 행위들을 하면서. 성장을 위한 '행위' 그자체가 목적이 된다. 곧 앞에서 얘기한 일상의 소소한 행위를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소한 행위들로 디자인된 일상들이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여나간다. 그러면 삶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나는 그 흐름을 타고 또 바지런해진다.
이렇듯 선순환을 한다. 열심히 사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는 평화요 기쁨이요 바지런함이다. 이렇게 살다보니 삶은 한결 가볍고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리고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풍요롭고 행복하고 평화롭다.
그 무엇보다 생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