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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Feb 15. 2019

Bucket List 삭제하기

내가 살면서 안 하고 살 일들의 나열

 올해 전체가 사실 나에겐 도전인데, 이 해 안에서도 크고 작은 도전들을 줄기차게 이어가는 중이다. 지난 달엔 목공을 배웠고 이번 달엔 플라워 기초반을 시작했다. 지난 주가 첫 개강이었는데 한강몽땅 공모전 때문에 결석으로 날려먹고 두 번째 시간인 오늘, 나는 첫 수업을 들으러갔다.


오늘 처음 만들어본 꽃작품. 내 눈에만 이쁘다.


 목공이 정말 적성에 안 맞았던 지라, 플라워도 별 기대가 없었다. 그닥 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다 손재주가 뛰어난 건 아닌 듯하여 - 오늘 보니 참트루 아니더라 - 더 그랬다. 그런데 웬걸. 꽃을 보는 게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특히 꽃 향기를 맡는 게 꽤나 행복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는구나.


 물론, 잘 못한다. 초보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잘 못한다. 옆에 앉으신 분들의 꽃꽂이를 곁눈질하다 내 꽃을 보면 이게 대체 뭘까....? 의문이 퐁퐁퐁. 분명 똑같은 재료를 받았는데... 나랑 같은 재료로 만드는 거 맞나...? 목공 수업 때와 같은 경험을 반복하는 건 내 느낌적인 느낌인가....?


 애시당초 이 수업을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꽃을 만지는 분들과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함이니, 겸허한 마음으로 수업을 완료하는 데 의의를 둘 작정이다. 


아니, 사실 이건 핑계고. 


 나는 그냥 내가 잘 못하는 분야를 안 좋아하는 거 같다. 잘한다 소리 듣는 분야만 더 신나서 노력하는거 보면. 프로그래밍, 목공, 플라워까지 퇴사하고 도전해본 일들이 다 너무 어렵다. 성질 급하게 판단해 볼 때, 나는 이 세 분야 어디에도 그닥 흥미가 있거나 그렇다고 재능이 있거나 하지 않다. 아마 예상컨데 아-주 열심히, 바득바득해야 남들하는 평균치 정도일 걸? 그만큼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남보다 뒤쳐진다고 느끼는 일들은, 참 희안하게도 아등바등 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애시당초 스타트가 다른데 뭘 달려, 달리긴. 나만 진빠질 텐데.


 뭐,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 무사히 수업은 끝냈다. 양 손 무겁게 꽃을 안고 지옥철을 탑승했는데 3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한국으로 기어들어와 새로운 거 해보겠다고 지옥철을 낑낑거리며 타고다녔지. 


 그 16년도의 나는 영상을 하겠다고 에프터 이펙트 학원이 위치한 홍대를 출퇴근하듯 다녔다. 아, 한 일주일밖에 안 다녔구나.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점은 딱 하나다. 


영상 작품 하나 만드는 데 수많은 노가다와 시간이 필요하구나 


이걸 깨닫고 바로 학원수업과 그 길을 포기했다. 자신이 없었다. 산더미같은 요리 재료를 사왔더니 정작 음식은 한 접시가 나오는 느낌이었다. 엄청 시간을 투자했는데 겨우 10초 남짓의 영상이 결과물인 게 성미에 안 맞았다.  게다가 내가 원하는 바를 구현해내려면 최소 2년에서 3년은 필요하겠더라. 바로 의욕이 없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27살에 투자하는 2-3년은 꽤 괜찮은 투잔데, 나는 왜 그렇게 조급했지? 지나보니 그닥 긴 시간은 아니었네. 아무튼, 그때 아트 디렉터/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wish careers에서 지워버렸다. 동시에, '내 손으로 뮤직비디오 만들어보기'와 같은 버킷 리스트도 삭제했다. 정 만들고 싶으면 그냥 잘 하시는 분에게 정당하게 값을 치루고 맡기자.


 내 20대는 그리고 지금은, 버킷 리스트 지우기가 아니라 버킷 리스트 삭제하기 행보다. 막연하게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일들을 실제로 해보면 내 상상과 현실 간의 갭이 꽤 크다. 안 그런 일이 없었다. 개발자가 뚝딱뚝딱 앱이나 웹을 만드는 게 멋있어 보였는데, 내가 해보니 모니터 보다가 눈 빠지겠더라. 코딩 언어를 종일 본 날엔 내가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로 변신하는 느낌이었다. 말랑말랑한 내 감수성이 쩍쩍 마른 대지에 흡수되어 고갈되는 느낌. 목수가 톱질하고 끌질해서 뚝딱뚝딱 제품을 만드는 게 멋있어 보였는데 내가 해보니 하루 종일 나무 가루에 눈과 목이 따가웠다. 연장 다루고 난 다음에 느껴지는 근육통은 덤.


 Wish Careers와 Bucket List를 지우고, 삭제하고, 닫았다. 이건 안 맞는 길이구나 혹은 안 맞는 일이구나라는 걸 하나씩 확인하면서.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호기심의 영역에 두면 막연한 환상만 생성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눈 딱 감고 해본 다음에 판단하는 게 한 이백배는 낫더라. 그렇게 이 일, 저 일 해보다가 '이거다!'하는 일이 있겠지. 뭐, 없어도 괜찮고. 



.....

진짜 없을리는 없겠지....? 분명 있겠지....? 있을거야.... 그치? 내가 지금 그냥 못 찾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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