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을 갈 때마다 J는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시장이다. 숙소가 너무 멀지만 않다면, 자유 시간에 틈을 내서라도 들렀고, 일정에 시장 구경을 넣기도 했다. 특별히 기념품을 사지도 않았다. 그저 시장만의 활기와 생기를 마주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시장은 언제나 계절보다 한 발 먼저 반응했다. 봄엔 냉이와 달래, 여름엔 옥수수와 참외, 가을엔 햅쌀과 밤, 겨울엔 뚝배기 국밥. 시장은 계절을 알려주는 가장 감각적인 달력이었다.
하지만 모든 시작이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J가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갔던 20대, 낯선 나라의 시장은 그저 북적거릴 뿐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음식에 마음을 닫은 채, 결국 맥도날드에서 시간을 떼웠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았다.
그의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 건 약 8년이 흐른 뒤, 이탈리아 여행에서였다. 단체 관광객 무리에 끼어 들른 가죽 전문점. 그리 관심이 없었던 J는 혼자 밖으로 나와 근처 광장으로 향했다. 우연히 장이 서 있었다.
장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먹거리와 기념품은 넘쳐났고, 사람들이 자신이 읽던 책이나 오래된 장난감을 팔고 있었다. 공산품보다, 시간을 팔고 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책을 사고 싶었지만, 이탈리아어는 그에게 그림책일 뿐. 돌아서는 발길엔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그 이후로 J의 여행 코스엔 늘 시장이 포함됐다. 대만, 베트남, 일본. 어디를 가든 그 나라 고유의 풍경과 냄새, 음식과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배앓이를 많이해서 식도락은 못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시장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한창 부모님과 전국 여행을 다닐 때도, 전국의 장터를 따라 다녔다. 그땐 단지 부모님의 요청이라 따라갔고, 시장엔 별 흥미도 없었다. 하동으로 정선으로. 몇 시간을 운전해도, 그저 운전이 좋아서였지, 시장 자체에 의미를 두진 않았다.
그런 J가 어느 순간, 시장을 ‘살아있는 삶의 현장’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짐을 이고 버스를 타는 사람들, 귀한 식재료, 익숙해진 상인의 얼굴들. 시장은 이제 단지 장보는 곳이 아니었다.
“장날만 기다렸다”는 인사 한마디에 튀김을 덤으로 얹어주는 마음, 먼 데서 왔다고 말하면 선지가 두둑이 들어간 국밥. 처음엔 그 인심이 낯설고, 어쩐지 빚을 진 기분이었지만, 그것이 ‘사람 사는 정’이라는 걸 그는 이제 안다.
이제는 J가 먼저 말한다. “멀리서 왔어요”라고. 덤을 달라고 웃으며 말하고, 상인이 남는 게 없다 하면 “다음 장날 또 올게요!”라며 능청을 떤다. 그 변화가 그 스스로도 낯설지 않다.
시간이 지나 장터는 점점 줄어들었고, 부모님의 연세도 더해졌다. 자주 찾던 5일장은 이제 기억 속의 장이 되었다. 하지만 TV 속 장터 장면 하나에도 수많은 추억이 다시 피어난다.
J에게 시장은 이제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는 곳, 정을 사고파는 곳, 그리고 ‘삶의 온기’를 기억하게 해주는, 그런 특별한 장소다. 한 그릇의 국밥, 한 조각의 덤은 내게 새로운 시선을 안겨주었다. 이제 나는 더 많은 삶의 현장을 마주하러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