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가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들은 말은 이거였다.
“도장 하나 만들어 오세요.”
그 말에 J는 잠깐 멈칫했다. 인감도장조차 없던 터라 처음엔 막도장을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곧 공무원에게는 따로 쓰는 도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쭉한 몸통에 한쪽엔 성, 다른 쪽엔 이름이 새겨진 결재용 도장. TV 속에서 보던 그런 도장이었다. 도장을 만들어 담당자란에 처음으로 찍던 날, J는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을 느꼈다. 책임감? 도장 하나에 무게가 실렸다.
신규 직원들을 보면서 당신의 신규 때가 생각나서였을까, 과장님께서 농담섞인 진담을 건네셨다.
“다들 도장 잘 간수하세요. 공무원은 도장이 생명입니다. 아무나 막 찍게 두면 큰일 나요.”
J는 그때 처음으로 '도장'이란 작은 물건이 담고 있는 책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 처음 만들었던 도장이 닳아 새로 만들 시점이 되자, 조직은 이미 전자결재 시스템으로 바뀌어 있었다. 종이 서류는 점점 사라지고, 결재란에도 도장 대신 이름 석 자를 적는 일이 많아졌다. J의 도장은 그렇게 서랍 속에 잠들기 시작했다.
공무원 조직에서 1월과 7월은 인사의 계절이다. 인사 절차는 점점 단순화되었고, 담당자간 인수인계도 전자 시스템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장급 이상은 달랐다. 사무인수인계서를 별도로 작성해, 전임 과장님과 후임 과장님 뿐만 아니라 입회인이란 명목하에 국장님의 도장도 직접 받아야 했다. 사무인수인계서를 들고 도장을 받으러 다니면서 J는 또다시 긴장했다. 혹여 오타라도 있을까, 받아야 할 도장을 놓칠까. J는 도장의 무게를 다시 한 번 느꼈다.
요즘 세대에게 도장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J는 아직도 도장이 더 믿음직스럽다고 느낀다. 전자책보다 종이책이 편하고, 온라인 쇼핑이 익숙해도 신선 식품만큼은 직접 골라야 마음이 놓이는 마음처럼.
J는 언젠가 들었던 ‘인감 도장에 홈이 없는 이유는, 그만큼 신중하게 찍으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도장 문화가 아직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경계’이자 ‘책임’이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이 아무리 디지털로 변해도, 여전히 남는 아날로그 문화가 있다. 누군가는 꼰대의 흔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J는 그것을 ‘남겨야 할 가치’로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바꿀 필요는 없다. 변화는 당연하지만, 변화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다. J는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쉽게 버리려 했던 중요한 것들이, 서랍 속 조용한 도장처럼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