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모든 것이 멈췄다. 운동도, 취미도, 일상도.
J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0년 넘게 즐겨온 배드민턴도, 가을 전시회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던 그림 수업도 모두 중단됐다. 공무원이라는 직업 특성상, 섣부른 행동은 불이익으로 돌아오곤 했다.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혹시나’에 기대어 모든 걸 걸기엔 너무 무모했다. 그래서 그는 멈췄고, 기다렸다.
직접 체험할 수 없다면, 간접 체험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초보자가 아니어서 그럴까? 잘하네, 못하네, 분석하며 보는 재미가 있었다. 평론가처럼 몰입하는 그 순간만큼은 일상의 답답함도 덜해졌다.
그 즈음, 한 유튜버가 눈에 들어왔다. '이연'이라는 이름의 작가였다. 툭툭 던지듯 말을 이어가면서도 묘하게 울림이 깊은 영상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젊은 나이에 저런 성찰이 가능할까? J는 궁금했고, 결국 책 한 권을 주문했다.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이연, 미술문화, 2021)》였다.
시간이 흘러, 책은 서가 속 어딘가로 잊혀졌다. 그러다 최근, 업무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뒤엉켜 있던 어느 날, J는 그 책을 다시 마주했다. 책을 펼치자 줄이 그어진 문장과, 손글씨로 써둔 메모가 나왔다. 평소 책에 밑줄 긋는 것을 싫어했는데, 이 책에는 예외가 많았다.
“이 정도 재능은 널리고 널렸을 텐데 그걸로 되겠어?”
그 문장 옆에는
“vs <천재를 이기는 방법> – 이현세”
라고 적혀 있었다. 그 시절의 자신이, 분명 어떤 다짐을 하고 있었던 흔적이었다.
또 다른 페이지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모임 단톡방을 극도로 싫어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이 싫다. 안 그래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폰에 저장되어 있는데, 가끔 싹 다 지우고 싶다. 이놈의 사회생활이 뭔지…”
혼자만의 삶을 꿈꾸던 시절의 감정이, 고스란히 책장 속에서 되살아났다.
요즘 J는 새로운 업무를 배우고 있다. 20년이 넘는 직장생활이지만 업무가 바뀌면 여전히 힘들다. 스트레스는 계속되고, 질문을 하면 가르쳐줬다며 툭툭 던지는 동료에게 상처 받는다. 자신도 누군가의 설명을 통해 배웠을 터인데, 왜 그렇게 날카롭게 굴까. 다행히 기죽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참아냈지만, J도 알고 있다. 자신이 겁내고 있다는 것을. 해보면 되는 걸, 실수할까봐 계속 묻고 있다는 것을.
J는 스스로를 '청각형 학습자'라 말한다. 귀로 듣는 것이 더 편하고,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혹시 잘못되면 수습이 안 될까봐.’
그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지나고 나면 '왜 그랬을까? 천천히 배우면 되는 거였는데.’ 라고 말할걸 알면서도, 눈앞의 조급함은 자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림을 시작하기 전, 새하얀 종이를 마주할 때의 그 막막함처럼, J는 지금 새로운 업무 앞에서 멈칫거리고 있다.
그래서일까. 오늘 따라 책상 위에 놓인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이 더 크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속의 한 문장이, 오늘을 버틸 작은 기운을 건넨다.
아직 서툴 뿐이지 영 못 할 일들은 별로 없다. -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p1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