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일상 - 잿더미 속에서, 다시 공존을 묻다

by 조카사랑

J의 고향은 경북 예천이다. 그래서 부모님과 나들이를 갈 때면 자연스레 경북 지역으로 발길이 향한다고 했다. 영주의 부석사, 안동의 봉정사… ‘오늘은 어디 갈까?’ 고민하기도 전에 차는 벌써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익숙한 길, 익숙한 계절의 흐름이었다. 그 길 위에서 지난 3월 대형 산불이 지나간 자리를 몇 차례 지나쳤다.


차창 너머로 본 그 풍경은 TV에서 보았던 화마의 기록을 상기시켜 줄 뿐, 어떤 감정을 자극하진 않았다. 그저 ‘안타깝다’는 말로 갈음되던 거리감 있는 공감. 그런데 이번 나들이에서, J는 처음으로 그 거리감이 무너지는 순간을 마주했다.


봉화 청량산 계곡을 따라 내려오던 길. 한쪽 산허리가 거칠게 그을린 채 드러나 있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고속도로 옆에 검게 타들어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차 안은 금세 정적에 잠겼고, 그 풍경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TV 화면 속의 산불은 너무 작았다. 실제로 마주한 풍경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내가 타인의 고통을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라는 자책이 밀려들었다. J는 산불 현장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두사람위 실수가 저렇게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는지?’ 놀랄 따름이었다. 인간의 부주의가 만든 이 폐허는 같은 인간으로써 책임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J는 문득 자신의 기억 저편에서 오래된 장면 하나를 꺼내놓았다. 2004년, 공무원으로 일하던 초년 시절. 처음 산불 진화에 동원되었다. 석유화학단지 인근에서 시작된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전 직원이 소집되었다. 정말 불덩이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 잔불을 정리하고 돌아서면 다시 불이 살아났다. 헬기가 물을 뿌려주는 동안 대기하다가, 불이 잦아들면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 긴박함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처음으로 실감했던 순간이었다.


최근 뉴스에서 3월 사ᅟ건불 피해자달의 삶이 여전히 ‘거기 멈춰 있다’는 보도를 봤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J를 짓눌러왔다. 어설픈 위로 한마디는 도리어 상처를 줄 뿐이었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일 텐데, 마음속 빈자리는 과연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


산이 다시 살아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까? 신기하게도 산불 현장 한켠엔 이미 어린 풀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연약한 생명이 우람한 산림이 되려면 몇십 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사이 폭우라도 내리면, 그 어린 뿌리들이 버텨낼 수 있을까? J는 그 앞에서 단순한 낙관을 허락할 수 없었다.


자연이 스스로를 회복하는 데는 인간의 시간보다 훨씬 긴 리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긴 리듬을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간의 태도 역시 필요하다. 공존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니니까. 이번만큼은 인간이 자연 앞에 조금은 겸허해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저지른 일이라면, 우리가 함께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길을 반드시 찾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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