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 반, J는 퇴근을 했다. 오랜만에 밝은 시간에 사무실 문을 나섰다. 연초부터 자신에게 했던 다짐이 있었다. 수요일과 금요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퇴근하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 다짐을 지키기엔 너무 무거웠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에 가장 먼저 포기한 건 독서였고, 그 다음은 운동, 마지막이 블로그였다. 블로그는 점심시간 짬을 내 사무실 책상에 앉아 쓸 수 있었지만, 독서와 운동은 시간을 따로 내야 했고,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7월에 담당 업무가 바뀐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책도, 운동도, 그림 수업도, 다 중단된 채, J의 일상은 오직 눈앞의 일로만 채워졌다. 해야 할 일이 늘 먼저였고, 그 외의 것은 아무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일상이 무너졌고, 그 무너짐이 마음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던 길. 골목 담벼락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를 마주했다. 모두가 더위에 지쳐 숨을 죽이고 있을 때, 그 꽃은 홀로 꼿꼿하게 피어 있었다. 이름도 모를 그 꽃이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며 J는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다. 그 꽃이 이렇게도 예쁘게 피어 있는 걸 보니, 마치 “너도 버티면 언젠가 다시 피어날 수 있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오늘, J는 2주 만에 해가 떠 있는 시간에 퇴근을 했다.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은 도시 풍경이 낯설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대로 곧장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가방 안엔 읽지 못한 책이 있었고, 집에 들어가면 또 침대에 쓰러질 게 뻔했다. 도서관에 들를까? 하지만 서가 사이를 기웃거리다 시간만 흘러갈지도 몰랐다. 커피숍? 요즘 커피 한 잔 값도 아까운 때라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신기하게도, 바쁠수록 더 많은 걸 하고 싶어졌다. 내일을 위해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오직 쉬기만 하기엔 너무 억울했다. ‘나는 나인데, 왜 내 하루는 온통 회사로만 채워져야 하지?’ 아마도 그 억울함이, 탈출하고픈 욕망이, J를 이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도서관으로 갈지, 커피숍으로 갈지 결정하지 못했지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오랜만에 삶의 주도권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주말엔 밀린 일들을 몰아서 처리해야겠지만, 이번엔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번 바쁨은 ‘나를 위한 바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하루의 끝에서, J는 다시 자신의 삶을 부여잡았다. 오늘은 분명 조금 더 나아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