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쓸모는 무엇일까?
어찌어찌 꼬박꼬박 쓰다 보니 매일 글쓰기 6일째. 그냥 쓰면 될 것을 꼭 이렇게 날짜를 새고, 작심삼일의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며 의미부여 하는 초보 글쓸러입니다. 솔직히 아직 매일 읽고 쓰는 삶이 일상과 착 달라붙지는 못했어요. 매일 읽고 쓰고 운동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기까지는 아직 한참은 더 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저는 호수 위 백조 같달까요. 아, 오해는 마세요. 백조의 호수의 그 여리여리 어여쁜 공주님 백조 말고요, 호수 위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물아래로는 죽겠다고 물장구를 쳐대는 그 생존형 백조 말입니다.
아니 사실 물 위로도 그다지 평온해 보이는 것 같진 않네요. 아직도 엄마랑 수시로 끌어안아야 충전된다는 고1, 중1 두 딸을 챙기는 일이 최우선이고, 뭐든 혼자서 잘 하지만 그래도 매일 늦게 퇴근하고 새벽같이 나가는 신랑에게 마음이 쓰여 그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야 잠이 오고, 출근하는 이른 아침에 배웅이라도 해줘야 덜 미안하니 늘 쪽잠은 본편, 수면 부족은 별책부록. 본업은 주부이지만 부캐인 독서교실 선생님으로 주 6일 수업도 해야 하고, 월 2회 돌아오는 도서관 봉사는 올해로 벌써 10년째네요. 집안 곳곳에는 책 모임에서 함께 읽고 있는 책들이 영수증과 메모지 책갈피를 입에 문채 애타게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날 좀 펼쳐봐야 하지 않겠냐고. 가끔 아니 꽤 자주 생각합니다. 대체 나는 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바쁘게 사는 걸까. 아무도 내게 강요한 적 없는 겉바속바( 겉도 바쁘고 속은 더 바쁜)의 삶. 저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며 아등바등 달리고 있는 걸까요?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쓸모를 발휘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거라고 끊임없이 나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는 걸까요?
13년 전, 둘째 출산을 앞두고 사표를 내던 그날. 10년의 회사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돌아서 나오던 그날의 쓸쓸함이 지금도 가끔 제 맘 속에 알 수 없는 찬 바람을 일으키곤 합니다. 무슨 일이 주어지든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일했고, 매일 야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던 지긋지긋하게 바빴던 회사 생활이었지만 그때의 제 일과 일하는 저의 모습을 꽤 사랑했었나 봅니다. 한때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회사라는 존재가 사표를 내고 나오는 순간, 순식간에 차갑고 냉정하게 대문을 닫아걸어 잠근 거대한 성벽처럼 느껴졌던 그날. 고층 빌딩 사이 상암동의 어느 골목. 마지막까지 배웅해 준 고마운 후배에게 웃으며 손 흔들고 돌아서 걷던 그 길에서 조금 울었던 것도 같습니다. 내 인생의 한 챕터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느낌. 이제 나는 쓸모의 세계에서 무쓸모의 세계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는 걸까. 그동안 내가 쌓아왔던 경험과 성과들은 이제 더 이상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증명해주지 못하겠구나.
내 아이들과 가정에 충실하고자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음에도 그렇게 한숨 쉬고, 뒤돌아보며 경단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어느 회사 소속 과장 아무개'라는 타이틀이 나의 쓸모를 나타내주는 제일 중요한 타이틀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제 나는 마루와 고고기(아이들의 태명)의 엄마로만 살아가겠구나. 부끄럽게도 그 이름이 얼마나 가치 있고 감사한 것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내가 놓아버린 지난날의 명패를 아쉬워하며 보낸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할머니들 손에 의지해 큰 아이를 키웠던 반쪽짜리 워킹맘이 하루아침에 네 살, 한 살 두 아이를 24시간 돌봐야 하는 전업맘이 되었습니다. 모유 수유를 그렇게 오래 해본 것도 처음이었고, 매일 이유식과 유아식을 만드는 일도,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셔틀버스 앞에서 갑자기 소리 지르며 울고 뛰는 큰 딸을 잡으려고 아기띠에 둘째를 매단 채 뛰어다니는 등원 시간도 모든 게 처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시시각각 달라지는 아이들의 자라나는 모습을 곁에서 놓치지 않고 지켜볼 수 있었던 그 시간은 어설픈 초보 엄마가 조금씩 진짜 엄마로 성장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매 순간 갈팡질팡, 전전긍긍했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듬직하고 명랑하고자 애쓰던 아기 엄마는 아기띠 메고 유모차 끌고 놀이터 지킴이로 살아가던 몇 년을 지나 초등학교 학부모가 됩니다. 그리고 큰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던 그 해에 책과 다시, 만났습니다.
제 곁에 놓인 책이라고는 아이들 읽어줄 그림책과 베이비 위스퍼 그리고 삐뽀삐뽀 119 소아과가 전부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제발 책 그만 읽고 밖에 나가서 놀라고 잔소리를 듣고, 시간이 남을 때면 책부터 펼쳐 들고 소파에 파묻히는 게 행복이었던 저였는데 말이죠. 아이들이 다닌 초등학교에는 <학부모 명예사서>라는 학부모가 도서관에서 명예 사서로 봉사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내가 도서관에서 봉사하면 아이도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지 않을까 하는 야무진 흑심을 품고 명예사서로 지원을 했고, 그곳에서 만난 언니들과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초등학생이던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그림책으로 시작된 모임이 동화책과 청소년 문학을 거쳐 고전, 철학책, 시집, 자기 계발서 등 다양한 관심사로 확장됐습니다. 아이들이 자란 만큼 엄마들도 책을 읽으며 차근차근 성장한 10년이었습니다. 그 10년의 시간 동안 독서지도에 대한 관심으로 독서하브루타 관련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딱 한 팀으로 시작한 수업이 지금은 열 세 팀의 아이들과 만나 책 읽고 토론하고 글 쓰는 <독서하브루타 교실>로까지 이어진 지 어느덧 8년째.
브런치를 시작하고 글 쓰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다 보니 읽고 가르친 시간 동안 글도 같이 써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겠죠. 그동안은 쓰기에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기에 이제야 비로소 쓰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보면 10년 전 우연히 시작한 책 모임이 오늘 이 시간으로 저를 이끌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저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멋진 타이틀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큰 조직에 속해 대단한 일을 해내는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엄마이자 아내이자 주부이며, 딸이자 며느리이자 독서교실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할 다 떼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일 때 나는 어떤 사람인 걸까요? 그런 내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요? 동화책 <일수의 탄생> ( 일수의 탄생 / 유은실 글, 서현 그림 / 비룡소 )의 주인공 일수는 "그런 것 같아요."를 입에 달고 사는 소년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태어난 김에 흘러가듯 살아가는 소년이죠. 그런 일수에게 서예 교실 선생님은 묻습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니? 너의 쓸모는 뭐니?" 일수는 결국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도망치듯 서예 교실을 나왔고 그 후로도 그저 강물에 흘러가듯 떠밀려 살아갑니다. 그러다 문득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쓸모를 찾고 싶어진 일수는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나는 누구일까? 나의 쓸모는 무엇일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늘 바쁘게 지내고, 많은 역할을 해내며 살아가는 우리들. 그 안에서 내가 찾아 헤매는 ‘진짜 나’란 어떤 사람일까요? 내가 속한 작은 사회 안에서 내가 지닌 쓸모는 무엇일까요? 꼭 쓸모 있어야만 의미 있는 인생인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들이지 쓸모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는 상품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호수 위 백조처럼 끊임없이 물장구치며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는 나를 위해 가치 있게 쓰여야 할 '오늘'이라는 시간의 쓸모를 알기 때문은 아닐까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오늘이라는 시간. 그러나 사실 인간은 바로 5분 뒤의 일도 미리 예측할 수 없는 미지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소중한 지금, 여기. 내가 온전히 해낼 수 있는 일은 내가 지금 서있는 이 순간에 마음을 다하는 일 하나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내가 떠있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도 열심히 물장구를 치며 살아가나 봅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어찌나 피곤하던지 사실 이 글을 시작하며 제가 처음 쓴 문장은 "오늘은 하루 쉬어갑니다."였어요. 그런데 이게 웬걸. 오늘의 한 문장은 어느새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네요. 자꾸만 길어지는 글에 읽는 작가님들 피곤하실까 봐 오늘은 진짜 짧고 굵게 써보리라 다짐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무겁고, 긴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네요. 매일 쓰기 6일 차에 어쩌다 보니 자서전 같기도, 일기인 듯도, 고해성사인가 싶기도 한 글이 써졌습니다. 글쓰기는 어디서 시작할지는 정할 수 있어도, 어디서 끝날지는 끝나봐야 알 수 있는 그런 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해 보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매일 글쓰기 6일 차에 얻은 덤은 '요즘 뜨는 브런치 북' 선정의 영광입니다. 얏호!!
습관처럼 스크롤을 내리다가 낯익은 브런치북 표지와 제목을 보고 눈이 번쩍!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얼떨떨하면서도 너무 기뻐서 화면도 캡처하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신나게 자랑했습니다. 고마운 우리 슬초 브런치 3기 동기님들에게 축하인사도 잔뜩 받았지요. 매일 비슷비슷한 조회수를 보며 이게 맞나? 잘하고 있는 건가? 싶다가도 또 금방 두 주먹 불끈 쥐며, "크게 터지지 않으면 어때? 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거야!" 라며 괜히 센 척해보던 날들이었죠. 그런데 막상 Today's Pick이란 이름으로 메인 화면에 걸린 제 브런치 북을 보니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쩔 수가 없네요. 저는 여전히 타이틀에 연연하는 간판 집착자 인가 봅니다. 특별한 수식어나 미사여구 없이도 온전히 나 자체로서의 가치와 쓸모를 스스로 인정해 주는 날이 제게도 찾아와주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