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나의 퍼즐 조각들
#덕선이 #쌍문동 #브라질 떡볶이 #타임머신
나에게도 덕선이 같은 쌍문동 친구들이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덕선이와 쌍문동 친구들처럼, 나의 현실 인생에도 딱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16살의 그 시절, 쌍문동 골목길을 함께 누비던 우리를 묶어준 이름, <덩어리>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 앞 ‘브라질 떡볶이’에서 떡볶이 국물에 삶은 계란을 으깨 먹으며 다진 우정은 지금도 맘속에 매콤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일곱 명이 함께 쓴 교환일기에는 그 시절 꿈과 고민과 아무 말이 빼곡히 담겼다.
점심시간엔 책상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방송반 신청곡함에 넣은 곡 중 어떤 곡이 흘러나올지 숨죽여 기다렸고, 방과 후엔 농구대잔치 독수리 오빠들의 오빠부대답게 학교 운동장에서 엉터리 농구 시합에 열을 올렸던 우리들. 졸업 여행으로 간 대전 EXPO, 맥주 한 캔 숨겨 마시며 들킬까 두려워 손이 덜덜 떨렸던 긴장감조차 지금은 웃음거리다. 졸업식날엔 뿔뿔이 흩어진 고등학교 배정에 엉엉 울며 학교 뒷산에 타임캡슐을 묻었었지.
5년간의 일본 주재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우리 가족은 아빠의 새로운 부임지 근처인 쌍문동에 터를 잡았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던 그 시절, 나는 그녀들과 만났다. 하얀, 종현, 명은, 영신, 윤희, 지연. 먹는 거 좋아해서 하나같이 동글동글했던 우리들은 일곱 명을 아우르는 애칭을 <덩어리>라 정하고 정말 한 덩어리처럼 매일을 붙어 다녔다.
지금은 해외에 살고 있는 친구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연락이 끊긴 친구도 있다. 자주 만나진 못해도 열여섯 사춘기 소녀다운 모습 그대로, 늘 내 맘 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나의 덩어리들. 이사와 전학이 잦았던 초, 중, 고 시절을 통틀어 유일하게 남아있는 내 소중한 단짝들이다.
오늘은 덩어리 중 두 명의 친구들과 만남을 가졌다. 얼마 전 남편인 정은표 배우와 함께 첫 책을 낸 하얀이의 출간을 축하할 겸, 종현이의 휴직이 끝나기 전 얼굴을 보기로 한 것이다. 하얀이와는 서로 뭐가 그리 바빴는지 근 7년 만에 갖는 만남이었다. 우리 셋은 만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와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셋이서 꽉 끌어안고 한참을 웃다 보니 어느새 주책맞은 눈물이 쏟아졌다.
"나 왜 눈물 나니? 얘들아, 우리 벌써 갱년긴가?"
눈물로 빨개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겨서 한참을 또 웃었다. 다들 바쁘게 살았던 세월 속에서도 그때의 <덩어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식사 장소로 이동한다.
“이게 얼마만이니? 너 하나도 안 변했다, 야~~” 남들 눈에야 어떻든 우리 눈에는 여전히 열여섯 살 때 모습 그대로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오랜만의 만남을 축하하기 위한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을 떳떳하게 주문할 수 있다는 정도? 맥주 한 잔 곁들여 한참을 웃고 떠든다. 아들 이야기, 딸 이야기, 남편들 안부도 묻고 서로 아픈 곳은 없이 건강한지, 요즘 뭐 하며 지냈는지 이야기가 끝이 없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타임머신이다. 아이들 공부 이야기를 하다가 중학교 때 우리 시험공부하던 이야기로 넘어가 열변을 토하고, 남편들 흉을 보다 오래전 구남친 소환에 배꼽을 잡는다. 카페 창가 자리 작은 테이블에 모여 앉은 우리는 남색 체크무늬 교복을 입고 브라질 떡볶이를 먹으며 수다를 떨던 그때로 돌아간다. 단발머리에 하얀 양말을 두 번 접어 신고, 이마에 난 여드름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입술에 떡볶이 국물이 묻은 줄도 모르고 끝도 없이 재잘대던 열여섯 살의 내 친구가 바로 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그러다 화제가 내 브런치북으로 넘어왔다. 내 브런치 첫 글, <오빠들의 전성시대>의 주인공들답게 연세대 농구부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그러다 종현이가 특유의 토끼 같은 표정을 짓고 말한다.
"그런데 네가 쓴 <고3이지만 팬클럽 회장은 되고 싶어> 글 읽다가 나 깜짝 놀랐잖아."
그때 나랑 대학로에서 그렇게 자주 만나고, 레드 플러스 콘서트도 같이 보러 다니고 했었는데 그걸 완전히 잊고 있었노라고. 내 글을 읽으며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줄줄이 떠올라 너무 신기했다고. 나도 그랬노라고 말했다. 글을 쓰다 보니 그때의 우리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던 경험은 경이로울 정도였다고.
최근 <완벽한 하루를 꿈꾸는 허술한 우리>라는 제목의 에세이북을 낸 하얀이도 크게 공감을 한다. 하얀이 역시도 책을 쓰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글은 참 힘이 세다. 기억 저편에 묻혀있던 먼지 쌓인 사진첩을 끌어내 쓸고, 닦고, 빛내준다. 영영 장기 기억저장소에 잠들어 있을 뻔했던 여러 기억들을 소환해 '과거의 나'라는 필터를 거쳐 '현재의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40대 이후의 우정>에 대한 어느 교수님의 강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40대 이후에는 오랜 친구와의 우정이 더욱 소중하다. 그 친구들은 내 인생의 퍼즐 조각같은 존재다. 나도 잊고 살았던 과거의 내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증언해 주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말이 맞았다. 오랜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완성하는 퍼즐 조각이 되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맞춰지며, 나의 과거와 현재가 이어졌다. 오늘의 우리는 서로의 기억 속에서 퍼즐을 맞추며 울고 웃었다. 그렇게 흩어졌던 조각들을 다시금 이어 붙이며,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우리다워졌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하며 우리의 만남을 기록하는 지금, 내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글은 묻어둔 기억을 소환하고, 더 오래도록 기억하게 한다. 덩어리들과 나는 서로의 삶을 함께 기록해 온 동료이기도 하다. 그녀들과 나눈 시간은 가장 진솔하고 따뜻한 한 편의 이야기였고,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우리의 우정이 몇 장의 기록이 아니라, 몇 권의 책으로 이어지기를.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펼쳐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