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 명과 함께 부른 노래
“엄마, 나 주말에 여의도 다녀와도 돼?”
두 딸들이 며칠 사이 시간차로 물었다.
나의 대답은 둘 모두에게 똑같이 전해졌다.
“이번엔 집에서 마음으로만 함께하자.”
얘들아,
너희들의 마음은 존중하지만 허락까진 못해줬어. 미안.
고1인 다땡이는 아직까진 기말고사 진행 중이고,
중1인 윤땡이가 가기엔 너무 춥고, 위험할 것 같았거든.
오늘 보니 TV 화면 속 국회의사당 앞에는 너희보다 어린 초등학생 동생들의 모습도 보이긴 하더라.
지난 주말 TV에서 익숙한 응원봉을 발견하고 반가워하던 너희들. 너희들이 콘서트 갈 때마다 열심히 배터리 갈아 끼워 가지고 다니는 그 응원봉들이 고척돔도 잠실주경기장도 아닌 여의도 거리와 국회의사당 앞에서 반짝이며 흔들리고 있었지. 그 모습에 무척 반가워하던 너희들. 엄마도 참 반갑더라. 응원봉을 손에 든 언니들과 시민들이 공연장에서 최애를 응원하듯 유쾌한 기세로 정의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 응원봉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참 멋져 보였거든.
콩 심은 데 콩 나고, 덕구 심은 데 덕구 난다더니.
엄마 못지않게 덕질에 진심인 너희를 보며 괜히 혼자 반성하던 날도 있었어.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이라던데, 내가 너희에게 제일 많이 보여준 뒷모습이 책 읽는 뒷모습도 글 쓰는 뒷모습도 아닌 슬로건과 응원봉 챙겨 들고 공연장 가던 뒷모습이었나 싶어서 말이지. 그런데 이건 하나 짚고 넘어가자. 엄마 최애에게 응원봉이 생긴 건 이제 2년 정도밖에 안됐다?
응? 응원봉만 안 들었지, 공연장 다닌 역사는 훨씬 오래전부터 아니었냐고? 아니 뭐, 그건 그렇지만. 흠흠.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 녀석 모두 뱃속에 있을때부터 엄마의 집과 회사 외에 제일 많이, 자주 간 곳이 영화관과 공연장이었군. 그때는 일 때문이었지만 덕업일치의 삶을 즐기던 중이었기에 어쩌면 공연장 태교로 너희를 낳았는지도?ㅎㅎㅎ)
암튼 너희들의 덕질을 마냥 응원만 하기엔 엄마의 마음은 꽤나 복잡했다 이말이야. 나의 뒷모습이 너희에게 과연 좋은 본보기가 된 게 맞을까 싶어서 말이지.
그런데 지난 12월 3일 이후 여의도에서, sns에서, TV에서 형형색색 반짝이던 응원봉 물결을 보며 엄마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덕후의 본질이란, ‘좋아하는 일에 진심을 다하는 열정’이라는 걸 믐멈봄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응원봉을 든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주 찐하게 느낄 수 있었거든. 그리고 그 열정이 아주 유연하고도 평화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꿔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참 많이 고맙고, 감격스러웠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좋아서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엄마가 공감하고, 좋아하는 말들이야.
하나같이 우리 빠순이, 아니 아니 덕후들에게 어울리는 말들 아니니? 누굴 이기려고 하는 것도, 누구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나 좋으려고> 하는 게 바로 덕질이잖아? 그런 덕후들의 결과 일맥상통하는 이 말들에 엄마는 언제나 크게 끄덕이며 공감했던 것 같아.
12월 3일부터 오늘까지 약 열흘동안의 숨 막히던 시간들.
한숨 나오고, 가슴 답답하고, 화가 솟구치는 시간들이었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매우 감동적인 시간이기도 했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수호를 열망하는 수천만 덕후들의 뜨거운 열정이 밝고 바른 방향을 향해 하나 된 목소리를 낼 때 얼마나 유쾌하고 진취적으로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할 수 있는지를 목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대통령 윤석열 탄핵소추안은 총투표수 300표 중 가 204표, 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오늘, 탄핵안 가결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후 국회 앞을 꽉 채운 시민들 사이로 울려 퍼지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준 감동은 참 오랫동안 엄마 맘 속에 아름답게 기억될 것 같아. 끝까지 참 유쾌하고, 평화롭고, 하나 됐던 모두의 모습을 오래도록 되새기고, 기억하자꾸나.
“노래는 칼보다 강했고,
응원봉은 촛불처럼 뜨겁게 타올라 꺼질 줄을 모르더라.“
<다시 만난 세계> / 소녀시대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 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