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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드는 방 Dec 23. 2024

국립무용단 <향연>, 한국무용에 반하다

본격 한국무용 관람 강요글

향연:
 [명사] 특별히 융숭하게 손님을 대접하는 잔치


 귀가 얼얼하게 추웠던 어제, 혼자서 총총 국립극장에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기대하고 있었던 국립무용단의 <향연>을 보기 위해서였죠. 이미 다녀오신 분들의 후기가 너무 좋아서 며칠 전부터 두근두근 설렜습니다. 공연 보러 가기 전에 한껏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더러 있어서 최대한 마음을 비우고 가고자 애썼는데요, 결론은 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 처음으로 내돈내산 관람한 한국 무용 공연인 <향연> 은 입이 떡 벌어지게 아름다웠습니다. 오히려 첫 한국 무용 공연으로 <향연>을 봐버린 것이 걱정될 정도였어요. 눈이 너무 높아져버린 것 같거든요. 하지만 사실 걱정 보다는 기대가 더 큽니다. 다른 한국 무용 공연들도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샘솟을 만큼요. 그만큼 어제의 <향연>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좋은 건 나눠야하니까, 오늘은 국립무용단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 작품 같은 공연 사진들을 활용해 공연 후기라기 보다는 한국무용 관람 강요글을 써볼까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 무용이 더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야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테니까요.

2024. 12. 22, pm3 / 나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 :)

 사실 저는 한국 무용에 대해선 문외한인 초보 관람객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내돈내산으로 공연까지 보게 되었냐구요? 사실 제가 <향연>을 보게 된 건 얼마전 종영된 엠넷의 오리지널 댄스 시리즈 <스테이지 파이터> 덕분입니다. <스테이지 파이터>는 발레, 현대 무용, 한국 무용, 세 장르의 남자 무용수들이 춤으로 계급 전쟁을 펼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입니다.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감탄과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춤이라는게 이렇게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거였다니! 기존의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와 <스트리트 맨 파이터>와는 또 다른 클래식한 춤의 매력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발레와 현대 무용도 대단히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제 눈길을 사로잡은 춤은 한국 무용이었습니다. '숨고르기와 발끝의 예술'이라는 한국 무용답게 섬세한 움직임이 펼쳐보이는 몸의 언어는 신비롭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한국무용은 정적이고 섬세하기만 한 장르가 아니었습니다. 대단히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하며 절도 있고 파워풀한데다가 섹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이 매력 뭐죠? 우리나라 전통춤이 이렇게나 매력적인 장르였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이제라도 알아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한국 무용의 매력에 눈 뜨게 해준 <스테이지 파이터> 속 아름다운 무용수들

 팬심으로 쓰다보니 서론이 너무 길어졌네요.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봅니다. 자문자답 셀프 인터뷰 형식으로 풀어보는 아름다운 <향연>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1. <향연>은 어떤 공연인가요?

 한국춤의 대가들이 전통춤을 모아 재구성한 <향연>은 한국춤의 과거와 현재를 담은 무대입니다. 종묘제례에서 추어진 궁중무용, 바라춤과 같은 불교의식무, 장구춤과 같은 민속춤 모음을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변화로 풀어냅니다. 특히 ‘신태평무’는 무대 위에 함축적으로 담아낸 한국의 미와 50여 명의 무용수가 펼치는 압도적 스케일이 관객을 압도합니다.

(*향연 프로그램북 '작품읽기'에서 발췌)

https://youtu.be/XuIJbwEciUI?si=w2xxVpwOGhCUA8C1

2015.12.5.-12.6.,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공연 실황


2. <향연>의 매력 포인트는 무엇인가요?

하나, 강렬한 색채와 간결한 미장센  

 무대는 매우 심플합니다. 검정색 배경과 하얀 바닥. 무대 중간중간에 포인트로 등장하는 거대한 매듭과 무대 배경의 일부를 심플하게 채우는 LED 모니터 , 오고무 무대에서 작동하는 회전 무대 정도가 무대 장치의 전부입니다. 절제와 여백의 미가 돋보인달까요. 그런데 그 절제와 여백 덕분에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더욱 돋보입니다. 사진 속 색감 좀 보세요. 전통과 현대를 적절히 크로스오버한 의상은 또 어떻고요. 연출을 맡은 정구호님의 코멘트는 이러합니다. "전통적인 오방색을 해체 후 각 장마다 하나씩 색을 배치하는 등 장식을 덜어내고 단순화시켰다. 이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한국적인 미감을 더욱 화려하게 증폭시켰다." 오방색을 한 데 넣지 않고 해체 시켜 따로 배치한 것이 그야말로 킥이었네요. 공연 보는 내내 심플해서 더 화려한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1막 [봄] 중 <진연> / 무대 중앙의 커다란 붉은 매듭과 무채색 의상의 대비가 아름답다.


둘, 칼 군무_코어로 시작해 코어로 끝나다

 K-POP 칼 군무의 원조는 한국 무용이었나봅니다. 극의 90퍼센트가 군무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느낄만큼 독무 보다는 군무가 압도적으로 많은 공연이었습니다. 팔의 각도, 손목의 움직임, 발 끝의 디테일, 어깨춤의 리듬까지. 완벽하게 계산되고 맞춰진 무용수들의 동작을 보는 쾌감이란! 차디찬 얼음 사이다 원샷 보다 짜릿합니다. 원래 천천히 움직이는 춤이 더 어렵지 않나요? 게다가 배경이 단순하다보니 틀리면 바로 티가 날 것 같단 말이죠. 저는 2열 정중앙 자리에서 관람해서 무용수들이 한 발로 서서 균형을 잡을 때 미세하게 떨리는 발끝까지 다 보이더라구요. 천천히 다리를 들고 다시 또 천천히 발끝을 꺾어 세워 버티는 섬세한 움직임에서 "한국 무용의 시작과 끝은 '코어'였구나, 끄덕끄덕. 정말 대단해!!" 라고 속으로 5만 번쯤 감탄하며 봤습니다. 무용수들의 엄청난 연습량을 증명하는 칼군무와 그런 칼군무를 가능하게 한 코어의 힘에 엄지 척!!

공연의 시작을 여는 <제의> :  2열 종대로 선 24 명의 무용수의 칼군무에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셋, 도포 자락에 치이고, 치맛 바람에 홀리다

 한복에 치이고, 홀릴 줄이야. 선비들이 도포자락 휘날리며 책장을 넘기고, 술잔을 주고 받고,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춤으로 표현한 <선비춤>. 그동안 사극 속 도포 자락에 치여본 경험은 종종 있었지만 눈 앞에서 살아움직이는 도포 자락의 매력은 한국 무용 입덕을 부추깁니다. 선비들의 도포 자락이 무대 위를 길게 가로지를 때마다 어디선가 산들 산들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던 건 저만의 착각이었을까요? 저는 분명 들었습니다. 선비들의 도포 자락에서 흘러 나오는 바람의 노래를. 도포에만 치였게요? 우리 여성 무용수들의 치맛 바람은 또 얼마나 우아하고 아찔하던지. 풍성한 치마가 들썩일 때 그 아래로 살짝 살짝 보이는 버선발은 그야말로 시선 강탈. 장구춤과 오고무를 출 때 치맛 자락 새초롬하게 여민 늘씬한 자태는 또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조명에 따라 자줏빛도 되었다가, 보랏빛도 되었다가, 펼쳐졌다가, 펄럭였다가, 꽃 처럼 피어나던 무용수들의 치마는 작품에 생기를 더하는 또 하나의 주연 같았습니다.

무용수가 돌 때마다 아름답게 휘날리던 초록 치마. 하얀 저고리에 초록 치마 그리고 남색 리본 끈. 경쾌한 아름다움 만개.
검정 배경에 하얀 바닥 그리고 노란 치마. 한 폭의 그림 아닌가요?
진쇠춤, 자줏빛 치마 자락 펄럭이며
선비들의 고고한 자태에 멋을 더하는 파아란 도포


넷, 나 타악기 사랑했네?

 오고무, 장구춤, 소고춤, 바라춤, 진쇠춤. 모두 타악기를 치며 추는 춤입니다. 한국 무용수들과 타악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봅니다. 아름다운 춤선을 잃지 않으면서 타악기까지 절도 있고 리드미컬하게 연주해내는 무용수들의 능력치란. 웅장하고 절도있는 대북 연주로 시작해 360도로 회전하는 원형무대에서 18명의 무용수가 삼면에 메달린 다섯개의 북을 세워 두드리는 오고무. 13명의 무용수들이 장구를 메고 두드리며 돌고, 뛰고, 나르듯 무대를 가로지르던 장구춤. 소고춤 무대는 무용수들의 개인기 잔치였습니다. 비보잉 무대 저리가라로 역동적으로 화려한 춤사위를 펼쳐내던 13명의 남자 무용수. 활기찬 발재간과 박력있게 두드리는 소고의 울림이 흥을 돋웁니다. 연풍대, 자반 뒤집기부터 애크러배틱까지. 돌고, 뛰고, 돌고, 구르고, 다시 돌고, 도는 개인기 열전. 신나게 박수치며, 환호성 지르며 즐겼습니다. 타악기는 참 매력적인 악기입니다. 둥둥둥 울리는 타악기의 진동과 공명은 심장 박동수와 함께 객석의 열광 지수도 높여줍니다.

오고무. 아름답쥬?
소고춤. 점프, 점프, 점프 사진 찾아서 넣어야 하는데ㅜㅜ
바라춤. '바라'라는 타악기가 있는지도 처음 안 1인입니다.


다섯, 조흥동과 정구호 환상의 콤비

 '한국무용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전통춤의 대가 조흥동과 한국 무용을 사랑하는 디자이너 겸 공연 연출가 정구호의 만남은 매우 옳았습니다. 최고와 최고가 만나 최고를 만들어낸 거죠. 두 장인이 빚어낸 아름다운 전통춤의 그림은 안 본 사람이 손해입니다. 부족한 저의 해설로는 다 표현해내지 못한 <향연>의 매력을 조흥동 총예술감독과 정구호 연출의 코멘터리 영상으로 확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https://youtu.be/CAv36cEhKNg?si=GGzJndnZE-mg7blo



3. <향연>을 누구에게 권하고 싶나요?


아름다움이 주는 위로가 필요한 당신.

전통무용은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당신.

스테이지 파이터를 보고 무용의 매력에 빠졌던 당신.

K-pop의 칼군무를 사랑하는 당신.

2015년 초연 이후 무대에 올려질 때 마다

매진 또 매진을 기록한 흥행의 이유가 궁금한 당신.

이 글을 읽고, 한국 무용 한 번 봐볼까? 생각한 당신.


 안타깝게도 올해는 크리스마스날 1회 공연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전석 매진이어서 티켓을 구할 수가 없네요. 다음 번엔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제 글을 읽고 궁금증이 생기셨다면 꼭 한번 객석에서 이 감동을 직접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완벽하게 모두를 만족시키는 공연은 만나기 힘들겠지만 완벽하게 아름다운 공연은 만날 수 있습니다. 국립무용단의 <향연>을 통해서 말이죠.


 이상, 갑작스레 한국 무용의 매력에 빠져 입덕 위기인 햇살 특파원의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매우 솔직한 <향연> 관람 후기( 라 쓰고 본격 한국 무용 관람 강요글이라 읽는)였습니다.


한 줄 요약: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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