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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드는 방 Dec 21. 2024

라면 중에 라면은 남편이 끓여준 라면

커피는 남타커, 라면은 남끓라

라면 잘 끓이세요?

저는 라면을 참 못 끓입니다. 요리는 못하는 편이 아닌데 희한하게 제가 끓인 라면은 그렇게 맛이 없어요. 물을 정량대로 넣고 끓이면 너무 짜서 맛이 없고, 물을 정량보다 많이 잡으면 국물이 흥건한 한강(같은) 라면이 되어 밍밍해져 버립니다. 게다가 제가 라면만 끓이면 냄비에 문제라도 생기는 걸까요? 라면이 끓는 사이 김치 꺼내고, 젓가락 한 쌍 꺼내놓고 온 게 다인데 그사이 면은 푹 퍼져 흐들흐들 생기를 잃고 나부낍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도 저에게 라면을 끓여달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가끔 라면이 먹고 싶을 땐 조용히 스스로 끓여 먹습니다. 단, 아빠와 함께 있는 주말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 집에서 라면을 제일 맛있게 끓이는 사람이 바로 우리 남편 고동동 씨거든요.


금요일 밤, 귀가한 남편 손엔 장바구니가 들려있었습니다. 퇴근길 마트에 들러 주말에 먹을 간식거리를 사 오길 좋아하는 남편. 장바구니를 열어보니 맥주 몇 캔과 음료수 그리고 사각 어묵이 들어있네요. 어묵의 용도를 물으니 '어구리 라면'을 끓여보려고 사 왔다는 겁니다. 어구리 라면? 내가 모르는 신제품 라면인가? 알고 보니 어묵과 너구리를 합친 이름이라고 합니다. 너구리에 어묵을 넣어 끓이는 라면으로 편스토랑의 인기 요리사 어남선 슨생님이 개발한 레시피라고 하네요. 너구리에 어묵이라..... 맛있을까? 저는 무엇이든 기본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살짝 고지식한 입맛을 가진 사람입니다. 붕어빵은 팥붕파, 프링글스는 오리지널맛, 커피는 아메리카노. 라면이 라면다워야 맛있지. 어묵을 넣은 라면이면 그게 라면이야, 어묵탕이야. 내 맛도, 네 맛도 아닐 것 같은데. 흠흠. 큰 기대감 없이 남편이 끓여주는 어구리 라면을 먹어보기로 합니다.


토요일 12시. 아침을 건너뛰었더니 배꼽시계가 요란합니다. 슬슬 우리집 라면 쉐프에게 주문을 넣어봐야겠습니다. "쉐프님? 어구리 라면 2인분 부탁해요!" 오늘의 라면 요리사가 라면을 끓이는 동안 잠시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옆에 서서 보조라도 해줄걸, 미안해지네요.


치이이이익~~ 달구어진 냄비에 무언가 볶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까지 매콤한 마늘 볶는 향이 날아옵니다. 마늘 향에 더해진 이 매캐한 향기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고춧가루? 고추장? 보글보글 라면 국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맛을 상상해 봅니다. 제법 매운 향이 나는걸 보니 새빨간 국물에 한 입 먹으면 기침 나게 매운 얼큰한 매운탕 같은 맛일까요? 아니면 해산물 대신 어묵이 들어간 짬뽕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끓이면 끓일수록 매운 향은 사라지고 구수하고 진한 매운 국물의 향기가 식욕을 자극합니다. 더이상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겠네요. 완성된 어구리 구경하러 주방으로 가봅니다.


오! 어묵탕처럼 라면 안에 어묵이 조각 조각 잘라져 들어있을거라 상상했는데 뜻밖에도 어묵은 구불구불 세개의 작은 언덕을 만든채 꼬지에 얌전히 꽂혀 있네요. 탱글탱글한 면발을 품은 빨간 국물에는 고추 기름이 떠있습니다. 어묵에 기름까지? 너무 느끼한거 아닐까? 이런....... 가만히 앉아 얻어먹는  역할을 맡은 사람치곤 의심이 너무 많네요. 우리집 라면 요리사가 알면 섭섭하겠어요. 무얼 하든 꼼꼼하고, 깔끔한 남편은 라면을 그릇에 참 예쁘게도 담아냅니다. 일단 비주얼은 합격입니다. 눈으로만 봐도 탱탱한 면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간 국물은 얼큰하면서도 시원해보여 입맛을 자극합니다. 한쪽으로 얌전히 놓인 꼬지 어묵 덕분에 계란 없이도 충분히 푸짐해 보이네요.


국물부터 한 숟가락 맛을 봅니다. 오! 라면에서 이렇게 깊은 맛이? 김혜자 선생님 소환해야 할 것 같은, "그래, 이맛이야!"가 절로 나오는 칼칼하고 시원한 국물이 면발을 부릅니다. 탱글한 면발을 한 젓가락 들어 호로로록. 고추기름 때문에 느끼할 줄 알았건만 매콤한 국물에 코팅된 면발은 느끼하기보단 담백하고 쫄깃하네요. 고추기름의 비밀은 마늘과 함께 볶아낸 반 티스푼의 고추장이랍니다. 고추장이 들어갔는데도 짜지 않고 담백한 비법은 치밀하게 계산된 물의 양에 있다네요! 세상에, 침대만 과학인 줄 알았더니 라면도 과학인가봅니다. 마지막으로 어묵 한 입, 국물 한 입 먹어보고 나니 어구리의 매력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언젠가 망원 시장에서 줄 서서 먹어본 매운 떡볶이집 매운 어묵! 딱 그맛이었어요. 이제 사각 어묵에 너구리 한 봉지면 망원 시장까지 안 가도 되려나요?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에 라면과 어묵이 더해지니 든든한 포만감에 라면 먹고 나서 소화 시킬 겸 실내 자전거를 40분이나 타야했습니다. 뜨끈하고, 얼큰하고, 든든하게 맛있는 한 끼. 어구리 라면 합격!!


커피 중에 제일 맛있는 커피는 남타커라죠? 남이 타준 커피. 라면 중에 가장 맛좋은 라면은 역시나 남끓라네요. 남편이 끓여준 라면! 여보, 앞으로도 라면은 당신한테 맡길게! 대신 라면 먹고 후식 커피는 내가 내릴게요. 다음에도 신박한 레시피로 남끓라 잘 부탁해요. 세상은 넓고, 맛있는 음식도 많지만 아늑한 우리집에서 남편이 끓여준 소박한 라면 한 그릇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다니. 역시 행복은 멀리 있지 않나봅니다. 내일 아침,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얼큰한 ‘어구리’ 한 그릇 어떠세요?

국물이 튈새라 얌전히 면부터 담아내는 고동동 요리사
두 봉지의 라면을 정확히 배분하여 두 그릇에 나눠 담는 치밀한 고쉐프
맛보기 바빠 사진에 맛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네요.


<편스토랑 어남선생 류수현 어구리라면 재료/1인분 기준>

너구리 라면 매운맛 1 봉지

사각 어묵 3장

식용유 조금

대파 조금

고추장 0.5 큰 술

다진 마늘 0.5 큰 술

물 700ml

산적 꼬치   

 

<만드는 방법>

1.사각 어묵 준비하기

어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산적 꼬치에 꿰어 준비합니다.

2.기름에 대파 볶기

냄비에 식용유를 약간 두르고 대파를 넣어 중불에서 향이 날 때까지 볶습니다.

3.고추장과 다진 마늘 추가

볶아진 대파에 고추장과 다진 마늘을 넣고 가볍게 섞어줍니다.

4.물 넣기

물 700ml를 냄비에 붓고 끓입니다.

5.라면 스프와 어묵 넣기

물이 끓기 시작하면 너구리 라면의 분말스프를 넣고 준비한 어묵을 추가합니다.

6.면 넣고 끓이기

라면 면을 넣고 약 3~4분간 취향에 맞게 익힙니다.

7.마무리

그릇에 담아 산적 꼬치 어묵과 함께 내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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