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선혜 May 08. 2019

나는 아이를 방치하는 걸까?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 이유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기는 글렀으니 논술이라도 해야죠. 어쩌겠어요?"


나는 언론사를 박차고 나와 논술 과외를 하고 있었다. 대학원생이 되고 돈이 궁해져서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다. 다행히 메이저 신문사의 기자였다는 타이틀은 강사로서 꽤 좋은 명함이 됐다.


당시 만난 학생들은 대부분 중고등학생이었다. 학부모들은 논술이 대학으로 가는 마지막 티켓이라고 믿었다. 고등학생 채영이도 학교 성적으로는 인 서울에 입학할 자신이 없어서 '지푸라기'를 잡고 있었다.


채영이는 원래 똑똑한 아이였다고 다. 당시 이름조차 생소했던 '영어유치원' 출신이고, 과학 영재로도 뽑혔었다. 유명 사립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만 해도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애였다" 채영이. 공부 잘하고 착했던 딸이 엄마를 실망시킨 건 중학교 때부터였다. 갑자기 잘 다니던 학원을 말없이 빼먹기도 하고, 시험을 보면 평균점수를 겨우 넘겼다.

 

"머리가 나쁜 면 벌써 포기했죠. 그런데 원래 엄청 똑똑한 애예요. 얘가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한다니까요. 선생님이 동기부여만 확실히 시켜주시면 잘 따라갈 거예요."

웃고 있는 엄마 옆에서 채영이는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엄마, 이제 그만 좀 해. 얼른 나가."

인상을 쓰며 말하는 딸을 보며 엄마는 핀잔을 줬다.

 

"얘, 네가 알아서 잘하면 엄마가 이러니? 공부를 안 하니까 그런 거 아냐? 초등학교 땐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더니 어떻게 점점 멍청해지는 건지. 백날 좋은 선생님 모셔 다가 과외시켜봐야 소용도 없어, 아주 그냥."

아이 엄마는 눈을 흘기며 떠났다.


문이 닫히자 턱을 괴고 앉은 채영이는 볼펜 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너 전에 논술 과외해본 적 있어?"

채영이는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거렸다.

"얼마나 했어? 되게 재미없었지?"
내 물음에 채영이는 피식 웃으며 "5년 동안 논술과외를 했다"라고 말했다.


"논술이라면 지겨워요. 뭐 논술만 지겨운 건 아니고. 그냥 학원 다니고 과외하고 그런 거 다 싫어요."

채영이가 울상을 지었다.


"어릴 땐 엄마가 다니라니까, 재미없어도 다녔죠. 그런데 엄마는 나한테 관심 없어요. 그냥 학원만 다니면 된다고 생각하고 보내는 거예요.


내가 잘 이해 안 된다고 해도 진도 나가야 된다고 들으래요. 혼자 공부한다고 하면 선행해야 된다고 말리고... 쳇~ 주말에도 학원 가느라 쉴 시간도 없다니까요?"

얘기를 듣다 보니 내가 새 과외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힘든데 또 과외 선생님이 생겨서 어쩌니? 그런데 학교 시험이랑 모의고사 성적을 보니 바닥은 아니고, 네가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니 엄마가 포기 못하시나 보다.


나도 네 선생님이 된 이상 포기 안 할 거야. 나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공부를 도구로 삼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공부가 하고 싶어 지거든. 넌 뭘 하고 싶니?"


나를 빤히 쳐다보는 채영이에게 다시 물었다.

"꿈이 뭐 야?"

"저는 그런 거 생각 안 해봤는데."

"너 좋아하는 일은 뭔 데?"

"뮤지컬 보는 거 좋아해요."

"그래, 그럼 뮤지컬 기획해보는 거 어때? 공연 기획하는 거 말이야."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해요?"

"대학에 뮤지컬 기획이나 무대 연출 배우는 과가 있어. 우리 그걸 목표로 공부해보면 어떨까?"

아이는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였다.


그 후로 1년 넘게 과외를 했다. 채영이 먼저 속 이야기를 꺼낼 만큼 다가왔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채영이는 말했다.


"선생님 되게 특이한 거 알아요? 나 지금까지 과외도 많이 하고 학원도 많이 다녔는데, 선생님처럼 첫날에 나보고 꿈이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 없었어요. 우리 엄마도 나한테 그런 거 안 물어보는데."


나는 채영이를 보고 말했다.

"너 처음 봤을 때보다 눈빛이 많이 밝아졌어. 선생님은 네가 무언가가 되고 싶어 졌다는 거, 그걸로 만족해."

 

지금 생각해보면 채영이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번 아웃(Burn-out)' 상태였다. 아이들이 공부에 지쳐 더 이상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는 현상을 두고 '번 아웃 증후군'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모든 의욕이 다 타버리고 마음속에 시꺼먼 재만 남아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이다. 번 아웃 증후군은 대부분 지나친 선행학습으로 인해 일어나는 부작용인 경우가 많다.


과외하면서 '번 아웃'된 아이들을 지켜봐 온 나는 절대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태어나니 나의 다짐은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위태로웠다.

 

"계속 놀기만 할 거야? 요즘은 어렸을 때부터 사고력 수학 학원다녀야 해! 너 나중에 되면  애한테 원망 들어."

친구의 말이 파도처럼 철썩 나를 때렸다. 유튜브 속에서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는 율이 또래의 아이를 보면서 결국 내 모래성은 무너졌다.




'내가 아이를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이가 막 다섯 살이 됐을 때 나는 결국 영어유치원 입학 상담을 받았다. 유치원 내부를 구경하는데, 파란 눈의 외국인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여자 아이가 보였다. 그 아이 얼굴에 이가 오버랩됐다. 당장이라도 입학금을 내고 싶었다.


주말에 시댁에 가서도 내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빠듯했던 남편 월급으로는 아무리 쪼개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출을 받아서라도 영어유치원에 보내야 후회가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시어머니와 아이가 노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어머님은 아이와 동물카드를 가지고 놀고 계셨다. 아이는 호랑이 카드를 보며 서울대공원에 갔던 이야기를 하고, 코끼리 카드를 보며 과자를 코로 먹는 흉내를 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머님 등 뒤로 카드 몇 장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그 카드를 꺼내서 어머님께 건넸다.

"어머님 카드 여기 뒤에 떨어져 있네요."

어머님은 눈을 찡긋하시며 "그건 거기다 둬"라고 하셨다. 놀이가 끝나고 어머님께 "아까 왜 카드를 숨겨두셨냐"라고 여쭤봤다.


"율이가 알고 있는 동물만 가지고도 신나게 놀 수 있는데, 굳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물까지 알려줄 필요 있니? 아르마딜로 같은 건 어른도 발음하기 어렵고, 치타랑 퓨마, 표범은 다 똑같이 생겼는데 애가 어떻게 구분하겠어.


지금은 율이가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아는 걸 확인하면서 자신감을 느끼는 게 더 중요해. 성공을 많이 경험해 봐야 자신감이 생기거든."   


어머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채영이생각났다. 그리고 내 아이를 '번 아웃' 시키지 않겠다 다짐이 떠올랐다. 마음속에 파도가 잠잠해지면서 정신이 들었다.


다음날 영어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입학 여부를 묻는 상담 실장의 상냥한 물음에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저희 아이는 영어유치원 안 보내려 합니다."

몇 번 더 설득하는 실장의 말에 간곡히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내 신념은 바닷가에 쌓아둔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더 세찬 파도가 몰아치는 기분이다. 다만 파도가 칠 때마다 나는 다시 모래를 다지고, 성을 세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걱정하는 척 불안감을 조성하는 아이 친구 엄마, 정보임을 강요하면서 사교육을 권하는 강사의 말을 듣고 마음이 무너지더라도 다시 고쳐 먹으려 한다.


남들보다 빨리 앞서가면서 '엄마의 자랑'이 되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느끼면서 스스로 인생에 자부심을 갖기를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잔소리 없이 아이를 바꾸는 세 가지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