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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선혜 May 10. 2019

버럭 하지않는 우아한 엄마가 되고싶었다

채찍 대신 체크 리스트

"양말 신었?" 

"양치했니?"

"줄넘기 챙겼어?" 


그날도 아이에게 "했니?"와 "챙겼니?"를 반복하며 다그치고 있었다. 아이의 유치원 학부모 참관수업 날이었다. 오랜만에 스커트를 꺼내 입고 화장도 좀 해야 하는데 아이가 협조를 안 했다. 양말을 신는 건지 벗는 건지. 몇 분째 준비 상태는 진척이 없었다.


블라우스 단추를 급히 채우고 아이 손에서 양말을 획 낚아챘다. 좁은 양말을 한껏 늘려 아이 발을 욱여넣고나서 재빨리 스타킹을 신었다. "빨리!! 빨리!!" 양몰이하듯 엘리베이터에 아이를 몰아넣었다. 한 손으로 돌아간 스커트를 고쳐 입고, 다른 손으로 립스틱을 발라 겨우 준비를 마쳤다.


마음 속으로는 꿀밤을 서너대 때리고 싶었지만, 세상 다정한 표정으로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에 들어섰다. 먼저 도착한 10여 명의 엄마들이 자기 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아이 이름을 가슴에 달고 조용히 교실 뒷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인사하고 한 명씩 출석을 불렀다.


선생님이 호명한 아이는 손을 번쩍 들고 앞에 나가 노란 파일을 받아 갔다. 율이도 파일을 받고,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그 파일은 놀이 계획표였다. 수, 언어, 음률, 미술 등 영역을 나눠진 칸 옆에 오늘 내가 할 놀이를 체크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자 이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세요!"라던지, "미술 놀이는 이제 그만하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결과물을 뽐내면 호응해주거나 대답만 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계획표를 확인하면서 때가 되면 다음 놀이를 진행했다.


참관 수업에 참여한 엄마들모두 적잖이 충격받은 눈치였다. 집에서는 열 번 잔소리해야 겨우 움직이는 우리 아이가 스스로 놀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다니. 갑자기 잘 프로그래밍된 사이보그가 된 건 아닌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수업 후 상담하는 자리에서 선생님은 엄마들에게 한 명씩 소감을 말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오늘 저는 반성을 많이 했어요. 사실 아침마다 아이에게 잔소리를 했거든요. 제가 재촉해야만 아이가 움직인다고 불평했었죠. 그런데 오늘 보니 그렇게 만든 게 바로 저라는 생각이 드네요.


잔소리할 게 아니라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실천하게 했으면 되는데... 아이를 제가 너무 과소평가했습니다. 집에 가면 꼭 오늘 배운 대로 실천해 보겠습니다."


내 말을 듣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아이들은 생각보다 굉장히 똑똑하다"면서 "엄마가 아이를 아이로 보지 말고 인격체로 존중해주시라"고 당부했다.


"아이들은 스스로 정한 규칙을 훨씬 더 잘 지킵니다. 어른들이 지시할 필요가 없어요. 얼마 전에 인디언 텐트를 펼쳐놨는데 서로 들어간다고 난리가 났어요. 저는 서로 때리지 않는 한 다투게 둡니다. 그러다 불평하면서 아이들이 저를 찾아오면 어떻게 할지 회의를 해요. '10분씩 돌아가면서 쓰자', '4명씩만 이용하자' 아이들이 낸 의견대로 며칠 실천해보면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 도출됩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랑 규칙을 정하세요. 그리고 실천해보면서 수정하세요. 주도권을 가진 아이는 적극적으로 실천할 겁니다. 자기가 정한 거니까 불평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날 아이가 하원 하자마자 우리는 규칙을 정했다. 하얀 종이를 펼쳐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이라고 적고 아이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다. [1. 밥 먹기, 2. 그릇 치우기, 3. 세수하고 이 닦기, 4. 유치원 가방 챙기기, 5. 옷 입기] 삐뚤빼뚤 쓴 종이를 자석으로 냉장고 옆에 붙였다. 내일부터 당장 실천해보자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아이에게 "빨리 밥 먹으러 와!"라는 말 대신 조용히 체크리스트를 가리켰다. 그리고 웃으면서 "오늘부터 시작이야!"라고 말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으로 향했다. 한 손에 체크리스트를 들고 확인해가며 스스로 준비하는 아이를 보니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평화로운 아침이 실감이 안 났다.


나는 잔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아이가 부탁하는 것만 했다. 함께 옷을 골라 든 지, 유치원 가방에 빠진 게 없는지 확인해 주는 것들이었다. 체크리스트대로 준비를 다 한 아이가 "엄마 나 준비 끝났어요!" 하면서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화낼 일도 재촉할 일도 없는 아침이었다. 준비 시간이 평소보다 10분 단축됐다.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면서 물었다. "체크 리스트대로 해보니까 어땠어?" 아이는 당연히 이렇게 하는 게 더 좋다고 했다. 아이보다 좋은 건 나였다. 잔소리하면서 인상 쓸 일도 없고, 아이를 혼내고 보냈다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웃으면서 맞이하는 아침은 하루를 기분 좋게 했다.


체크리스트로 아침 일과를 시작한 지 1년 지난 요즘, 아이는 종이를 들고 다니지 않고 알아서 준비한다. 이미 순서가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다. 물론 초반에는 체크리스트를 보면서도 준비물을 깜빡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이가 떠난 뒤 양치컵을 빠뜨린 걸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들고 가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번 준비물을 빼먹던 아이는 더 꼼꼼하게 가방을 챙기게 됐다. 준비물을 들고 유치원으로 달려갔거나, 옆에서 다시 잔소리를 했다면 아이는 또다시 방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답답함을 꾹 참고 연습할 수 있도록 기다려줬더니 이제는 알아서 착착 준비를 마친다.


달리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면 더 잘 달리라는 격려가 된다. 그런데 채찍만 계속 휘두르는 건 폭력이다. 가끔은 잔소리도, 꾸중도 필요하지만 매일 듣는 잔소리는 아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결국 엄마의 잔소리에만 반응해서 움직이는 수동적인 아이가 되고 만다. 자기 내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행동하는 게 아니라, 엄마라는 외부의 목소리에만 반응해서 자율성을 잃어버리는 셈이다.


엄마의 잔소리를 문서화하자. 계속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 말고, 체크리스트를 건네 주자. 그리고 아이 스스로에게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버럭 하지 않는 우아한 엄마, 불가능한 미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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