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살에 아르바이트로 느낀 '돈의 맛'
마트에서 드러누울때가 돈 공부의 적기
율이가 문구점 한편에 서있다. 아무 말 없이 포켓몬스터 카드 꾸러미를 만지작 거린다. 들었다 놨다, 엎었다가 뒤집었다가 한참을 구경하던 율이는 결심한 듯 말했다.
"나 집에 칠천 원 있으니까 이천 원 더 모으면 이거 사러 와요."
한쪽에서 장난감을 두고 아들과 대치하던 다른 엄마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 얘 넌 몇 살인데 이렇게 의젓하니? 용돈은 언제 그렇게 모았어? 엄마한테 사달래지도 않고 착하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그 집 아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아 앙~~ 엄마 아아아~ 사줘~ 사줘~"
"너 하여간 집에 가서 봐!"
엄마의 으름장에도 아이는 장난감을 놓지 않았다.
우리 딸이 해탈한 스님처럼 굴게 된 데는 다 사연이 있다. 사실 율이도 여느 아이처럼 장난감을 좋아한다. 네 살 때만 해도 마트에 가면 삼보일배를 했다. 세 걸음 걷다가 장난감 사달라고 드러눕고, 세 걸음 걷다가 조르기를 반복했다.
당연히 마트에 가면 진이 쏙 빠졌다. 장을 보러 온 건지 애를 달래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기분 좋게 시작했던 쇼핑은 화난 채로 끝나기 일쑤였다.
나는 결국 아이와 마트에 가는 걸 포기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갔을 때 혼자 가거나, 인터넷으로 장을 봤다. 하지만 언제까지 마트를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그때 아이에게 돈에 대해 알려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린 시절 공무원이셨던 우리 아빠는 늘 '절약'을 강조하셨다. 용돈을 주고 일주일마다 용돈 기입장을 검사하셨다. 나는 당장 사고 싶은 게 있어도 꾹 참고 돈을 모았다. 용돈은 무조건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나의 투철한 절약정신을 칭찬해 주셨다. '돈 귀한 줄 아는 아이'는 칭찬을 받았을지 몰라도 경제관념을 배울 수는 없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월급을 받아도 돈을 쓸 줄 몰랐다. 그저 모으기만 했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돈 쓰는 재미가 없으니 돈 버는 의미도 없었다. '매달 카드 값을 갚기 위해 회사를 다닌다'는 동기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소비의 낙이 없으니 저축 또한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돈을 모으는데 집착해서인지 손해 보는 것도 싫었다.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게 겁 났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취직한 친구가 펀드와 경매로 자산을 불려 나갈 때 내 돈은 통장에서 잠자고 있었다.
아이에게 절약을 강요하는 대신 '돈의 맛'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돈을 쓰고, 모으고, 불려봐야 돈의 단맛을 알게 된다. 반대로 낭비도 해보고, 돈을 잃고 후회도 해봐야 돈의 쓴맛을 알게 된다. 돈을 모으기만 하는 건 더 이상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선 아이와 함께 규칙을 정했다.
첫 번째, 엄마 아빠는 어린이날, 생일, 크리스마스에만 선물을 사준다.
두 번째, 그 외에 사고 싶은 건 용돈을 벌어서 산다.
세 번째, 용돈은 미리 정한 일을 했을 때만 천 원씩 받는다.
이렇게 세 가지 규칙을 정하고 나서 아르바이트로 할 일을 골랐다. 분리수거, 빨래 개서 넣기, 신발정리 및 구두닦기부터 일을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절대 내가 먼저 지시하지 않았다. 아이가 스스로 하겠다고 나서면 그땐 기꺼이 도움을 청했다. 특히 함께 약속한 세 가지 일이 아닐 때는 용돈을 주지 않았다. 기분 내키는 대로 돈을 주면 아이가 모든 일에 대가를 바라게 될 것 같았다. 스스로 해야 하는 장난감 치우기나 양치질 같은 일은 당연히 용돈 벌이가 될 수 없었다.
빳빳한 천 원짜리를 서른 장 뽑아 두고 아이가 일을 마칠 때마다 손에 쥐어줬다. 처음 용돈을 받았을 때, 아이는 '시크릿 쥬쥬 드럼'을 사겠다며 얼마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삼만 이천 원이었다. "서른두 번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말에 아이는 한숨을 쉬었지만, 이내 눈을 반짝이며 "할 수 있다"라고 의지를 불태웠다.
우리 부부는 고작 다섯 살짜리가 그렇게 큰돈을 모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아이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유치원이 끝날 때 데리러 가면 "빨리 가서 아르바이트해야 된다"라고 말해 선생님께 오해를 사게 만들정도였다.
아이의 집념은 대단했다. 한 번도 지갑에서 돈을 빼서 쓰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두 달 모은 돈을 들고 아이와 장난감 가게에 갔다. 직접 '시크릿 쥬쥬 드럼'을 계산대에 올리면서 아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모은 돈으로 사는 거예요. 엄마가 사주는 거 아니고. 제가 아르바이트한 거예요."
아무도 묻지 않은 말을 하고 아이는 기분 좋게 장난감을 가슴에 품었다.
그런데 그 뒤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이는 더 이상 돈을 모으지 않았다. 돈 버는 재미를 알았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내 오산이었다. 아이는 대신 '탕진잼'에 빠졌다. 천 원을 받을 때마다 쪼르르 문방구로 달려가 뽑기를 했다.
내 기준에선 분명히 낭비였지만, 그 또한 배움의 과정이라 생각해서 지켜봤다. 그런데 도가 지나쳐 보였다. 매일 뽑기 하는 꼴을 보자니 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율아 맨날 뽑기 하는데, 원하는 장난감이 안 나와서 속상하겠다."
"아녜요. 그래도 재미있어요. 매일 뽑고 싶어요."
"너 돈 열심히 모아서 시크릿 쥬쥬 드럼 샀던 거 기억나? 그때 사고 싶은 장난감 사서 기분 좋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막상 사보니까 계속 기분이 좋은건 아니였어요. 돈 모으는 것도 힘들기만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열심히 돈을 모아 원하는 걸 사면 잠시 기분이 좋지만, 이내 허무한 기분이 들때가 있다. 반대로 소소하게 푼돈을 쓰면 즐겁지만 질 좋은 물건을 손에 얻진 못한다. 아이는 그런 양가감정을 느끼며 스스로 소비 기준을 세워가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아이 친구 두 명과 문구점에 갔다가 뽑기를 한 적이 있다. 친구의 엄마가 뽑기를 하라며 동전을 넣어 주신 덕분이었다. 친구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아서 심술이 났다.
두 친구는 "필요 없다"면서 장난감을 쓰레기통에 버리려 했다. 율이는 "그럴 거면 나 줘!" 하면서 장난감을 챙겼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말했다.
"버릴 거면 뽑기를 하지 말지. 엄마, 친구들은 돈이 아깝지도 않나 봐."
아이는 이제 돈은 함부로 낭비하면 안 된다는 것까지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아르바이트를 한 지 3년 정도 지난 지금 아이는 처음처럼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빨래를 걷어오면 "엄마 내가 아르바이트할래요." 하면서 나설 때도 있지만, 피곤하다고 안 한다고 할 때도 있다. 꼭 사고 싶은 장난감이 있을 땐 돈을 모아 사고, 그렇지 않을 땐 만약을 대비해 저축한다.
아이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배웠다. 그래서 말 안 해도 안다. 매일 일해서 돈을 벌어오는 아빠가 얼마나 딸을 위해 고생하는지. 당신 옷 한 벌 살 때는 망설이면서 용돈은 아끼지 않는 할머니가 얼마나 손녀를 사랑하는지. 아이는 구구절절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