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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선혜 May 29. 2019

독서는 지루한 게 정상 아닌가요?

책은 무조건 많이 읽을수록 좋다는 오해




아이가 일곱 살 되던 해 여름, 우리 가족은 이 동네로 이사 왔다. 초등학교가 가까운 이른바 '초품아 아파트'였다. '예비 초딩'인 유치원 친구들이 대부분 학교 근처에 모여 살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친구 집에 놀러 갔고, 나 역시 자주 친구들을 초대했다. 그때마다 엄마들은 "율이네는 집에 물건이 별로 없다"라고 말했다.



"어머, 책이 이거밖에 없어요?"



거실에 놓인 3단 책장을 보며 아이 친구 엄마가 놀랐다. 우리 집 책장에는 다섯 종류의 소전집과 단행본 몇십 권이 전부다. 어른 키보다 큰 책장이 거실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집을 많이 봐서인지 우리 집은 책이 별로 없어보였나보다.



내가 기자였다는 걸 아는 엄마들은 더욱 신기해했다. 명색이 기자 출신 엄마가 책을 별로 안 사주는 게 의외라고 했다.



"책을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쓰는 거 아녜요? 에휴 우리 애는 책이라고는 만화책밖에 안 읽으니...."


"누가 아니래요~ 아주 책만 읽으라고 하면 몸을 베베꼬고 난리예요."


나를 둘러싸고 엄마들이 고민을 털어놨다.


"율이는 그래도 책 많이 읽죠? 책 많이 읽으니까 한글도 빨리 뗐겠지."   




나는 "책보다 경험을 우선시하고, 책을 보며 수다 떨고,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게 비결"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이 세 가지 방법을 통해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기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책을 많이 읽어야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독서를 강한다. 정작 우리나라 성인의 독서율이 세계 최하위 수준인데 말이다.



사실 아이들에게 책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하얀 종이에 검은 글자밖에 없는 물건이 게임이나 공놀이보다 좋다고 한다면 특이한 것 아닐까? '정상'인 아이들은 독서가 지루한 게 당연하다.



특히 어른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책이 '권장도서'라는 타이틀을 달고 아이들에게 강요되는 게 문제다. 독서통장에 책이름을 쓰고, 독서록에 감상문을 쥐어짜 내면서 점점 흥미를 잃기 때문이다.

 


사실 책만 많이 읽는다고 모두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나는 독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언니처럼 책  좀 읽어라"라는 꾸중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 많이 읽는 언니는 글쓰기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언니 미안) 반면 엄마가 보기에 책도 별로 안 읽은 나는 글을 잘 썼고, 졸업을 앞두고 언론사 입사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권장도서 목록에 있는 책을 모두 섭렵한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번 좋아하면 그 책은 내용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봤다. "넌 왜 똑같은 책만 읽냐"는 말을 종종 들었다. 어른들은 이상하다고 했지만, 나는 책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보다 내가 아는 내용을 확인할 때 신났다.



책을 읽다가 궁금하거나 떠오르는 게 있으면 얼른 다른 책을 꺼내서 찾아봤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을 인형에 붙여 역할 놀이도 하고, 선생님이 되어 동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몇 년 전 EBS에서 '슬로 리딩, 생각을 키우는 힘'이라는 다큐를 보면서 재밌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안 읽었지만 글은 곧잘 썼던 비결이 바로 '슬로 리딩'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다큐는 30여 년 전 '은수저'라는 한 권의 책으로 6년 동안 국어 수업을 한 일본의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이들은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고, 질문하고, 반복하며, 다각도로 분석한다.



다독과 정반대 되는 슬로 리딩은 당시에도 낯선 실험이었다. 부모들의 우려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다케시 선생님이 가르친 졸업생들은 독서에 흥미가 높았고, 그해 높은 입시 성적을 올렸다.




다큐멘터리의 제작진도 우리나라에서 '슬로 리딩' 실험을 했다. 책 한 권을 6개월 동안 천천히 읽으면서 등장하는 단어를 활용해 시를 짓거나, 주인공이 사는 마을을 공부하고, 역할을 맡아서 연극으로 재연했다.



한마디로 책 한 권을 씹고 뜯고 맛보게 한 셈이다. 그 결과 실험에 참여한 대다수 아이들은 독서의 즐거움과 국어 과목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했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슬로리딩'을 실천하고 있다. 책은 자기 전에만 읽어주고, 낮에는 책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다. 대신 아이가 먼저 책을 읽겠다고 가져오면 최대한 재미나게 읽어다. 도서관이나 서점도 자주 가지 않다. 아이가 책에 갇혀 있지 말고 바깥세상으로 나가 경험하길 바다.



 자연관찰 책을 읽어줄 시간에 아이와 산에 가서 색색깔 나뭇잎을 모다. 잎이 길쭉한 외떡잎식물, 잎이 넓적한 쌍떡잎식물을 알려주는 대신 넓은 잎으로 부채질하고, 뾰족한 잎으로 콧수염을 만들며 다. 시간이 지나 식물에 관한 책을 읽다가 아이가 말다. "아, 엄마가 만들어준 콧수염이 외떡잎식물이었구나!" 몸으로 한 경험을 책으로 다시 확인하니 더 오래 기억되는 건 당연하다.




아이가 29개월쯤, 발달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인지능력, 운동능력, 사회성 등을 평가하는 항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휘력이었다. 아이가 51개월짜리의 어휘 수준을 보인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풍부한 어휘력의 비결은 '대화'였다. 나는 책으로 아이와 대화를 나눴다. 1시간 동안 책 10권을 읽는 게 아니라 책 한 권으로 한 시간을 떠들었다.




똑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도 좋은 습관이다. 보통 어른들은 책을 반복해서 읽기 싫어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아이들은 자기가 아는 내용을 확인하면서 재미를 느낀다. 어려운 단어도 여러 번 읽으면서 그 쓰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책을 패스트푸드처럼 먹어 치우는 게 아닌, 골고루 꼭꼭 씹어 먹게끔 해야 한다는 뜻이다. 햄버거만 먹고 건강하게 자랄 수 없듯, 많이 읽고 빨리 읽는 아이들의 사고가 풍부해지기는 어렵다.




지금도 율이는 책만 펴면 수다쟁이가 된다. 수십 번을 읽은 [강아지 똥] 책을 보며 "할머니네서 키우는 봉글이는 하얀색인데!", "강아지 똥 밟으면 너무 냄새날 것 같아. 그렇지 엄마?" 깔깔거리며 웃는다. 강아지 똥이 혼자 남는 부분에선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까 나도 강아지 똥 놀렸는데... 엄마 내가 놀려서 강아지 똥이 얼마나 슬플까?"


마침내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는 강아지 똥을 보며 아이가 활짝 웃는다.


"강아지 똥이 꽃이 됐네. 우리 집 앞에 민들레 꽃 많은데. 거기에도 강아지들이 똥을 쌌을까? 엄마 우리 내일 아침에 가서 한번 보자."




하지만 서점에 가면 책 읽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아이의 말을 막는 엄마들을 종종 본다.



"우와 이 드레스 정말 예쁘다. 엄마 나도 드레스 사고 싶어. 라푼젤 드레스 하고 똑같네. 그렇지 엄마?"


"들을 거야 말 거야, 엄마 이제 그만 읽는다?"




엄마의 핀잔에 샐쭉해진 아이가 조용히 입을 다문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저 책으로 무슨 대단한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엄마는 아이가 입 다물고 집중하길 바라는 걸까? 책을 보며 생각을 나누는 게 얼마나 좋은 논술 공부인데...



책을 싫어하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렇게 '책 수다'를 막아버리면 된다. 권장도서만 읽으라고 강요하면 더 빨리 책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포노 사피엔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강한 적수를 상대하기에 책은 별로 매력이 없어 보인다. 활자는 영상보다 많은 집중력을 요한다. 스마트폰 시대의 독서는 어쩌면 인내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책은 스마트폰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고, 어떤 책을 읽었느냐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자. 어린 시절, 책에 대한 호감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책과 친해질 시간을 주는 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 우리가 해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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