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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써니 Feb 09. 2021

후지이 이츠키의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서

영화 러브레터

 영화 러브레터는 1995년에 나왔고 국내 개봉은 1999년이었으니 꽤나 오래된 명작이다. 그런데 어렸을 때 봤을 때보다 어른이 된 후 보니 더 좋았다. 언젠가부터 겨울이 오면 러브레터가 생각났고 그래서 보고 또 보고 했다. 올해는 재개봉을 한다 해서 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이놈의 다리 수술 때문에 못 갔다. ㅜㅜ 겨울이 가기 전에 봐야 할 것 같아서 어제 집에서 봤다.


1. 와타나베 히로코의 관점

 영화는 조금은 불친절하고 다분히 혼란스럽다. 그러니까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고 그는 죽었는데 그의 연인이었던 와타나베 히로코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죽은 연인의 방에서 그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보게 되고 거기 적힌 죽은 연인의 예전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편지에 답장이 왔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답장을 한 사람은 동명이인인 여자 후지이 이츠키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찾아갔다가 못 만나는 일을 겪으며 그녀가 자신과 거의 똑같이 생겼음을 알게 되고 와타나베 히로코는 죽은 연인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정리하자면 두 후지이 이츠키는 성별은 다른데 이름이 같고 주인공인 두 여인은 얼굴이 매우 닮았다(나카야마 미호가 1인 2역을 했다)

 와타나베 히로코는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다. 행동도 참하고 정적이다. 그녀는 죽은 연인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다. 편지를 받은 여자 후지이 이츠키는 활달하고 엉뚱하며 동적이다. 둘은 얼굴이 닮았지만 성격은 정반대다. (나카야마 미호는 정말 우아하게 아름다운듯. 우리나라 배우 중엔 약간 송윤아 닮은 것 같다)

 이야기는 와타나베 히로코가 주인공인 것처럼 전개된다. 많은 사람들이 와타나베 히로코를 주인공이라 생각하고 그녀가 연인이 죽은 산을 바라보며 외치던 '오겡끼데스까' 가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기도 했다.


 2. 여자 후지이 이츠키의 관점

 그런데 다시 보니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여자 후지이 이츠키였다. 알고 보니 이 영화는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영화는 중반부가 지나서야 두 후지이 이츠키의 풋풋한 중학생 시절을 보여준다.

 두 후지이 이츠키는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동급생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된다. 어른들에게 학창 시절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학생 당사자들에게 학교는 일종의 정글과도 같다. 그런데 이름이 똑같은 이성은 매우 불편하고 껄끄러워 멀리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반 아이들의 장난으로 두 사람은 공동 도서 부장을 맡게 되기도 한다. (소녀 후지이 이츠키를 연기한 사카이 미키는 놀라울 정도의 미소녀. 가을 동화의 문근영 씨가 생각난다.)

  여자 후지이 이츠키에게 남자 후지이 이츠키는 그냥 이름이 같아서 불편했던 남자애일 뿐이었다. 와타나베 히로코가 편지로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여 기억의 심연에 숨어있던 그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남학생 후지이 이츠키는 얼굴은 잘생겼으나 매우 무뚝뚝하다. 도서부 활동도 거의 안 하고 읽지도 않는 책을 대출하여 대출카드에 이름을 남기는 장난을 즐겨 한다. 그런 그에게 여학생 후지이 이츠키는 말한다. '바보냐?'

 남학생 이츠키는 여학생 이츠키에게 짖궃은 장난을 칠 뿐 핑크빛 에피소드 같은 건 없다. 여학생 이츠키는 다리를 다쳐 육상 경기 때 제대로 뛰지 못하고 넘어진 이츠키를 보다가 들고 있던 카메라로 찍게 되고 옆 친구가 '방금 봤어?' 라도 물어도 '초점 어떻게 맞추는 거야?' 라고 시치미를 뗀다.

 그렇게 그냥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였던 이름이 같은 동급생은 와타나베 히로코의 편지로 소환되고 그녀는 결국 그 동급생이 2년 전 조난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자신이 졸업한 중학교 후배들로 인해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학생 이츠키가 빌린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도서 카드 뒷면에 자신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 책은 남학생 이츠키가 직접 여학생 이츠키 집까지 찾아와 반납한 책이었다. 여학생 이츠키는 그 책의 도서 카드 앞면까지는 봤으나 뒷면은 보지 못했다. 결국 도서 카드 뒷면에 그려진 남학생 이츠키의 수줍은 마음은 한 번도 보여지지 못했다.

 남학생 이츠키를 향한 여학생 이츠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는 걸로 보였는데 다시 보면 볼수록 여학생 이츠키도 남학생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카메라로 그를 보고 있다가 넘어지는 장면을 무심코 찍는다던지, 아버지 상을 치르고 돌아간 학교에서 그의 전학 사실을 듣고 책상 위의 꽃병을 던져 깨뜨린다든지 하는 행동을 보면 완전히 마음이 없었던 것 같진 않다. 다만 그냥 관심이 있는 정도, 그런데 그걸 절대 들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반면에 남자 이츠키는 여자 이츠키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고.

사실 이름이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건 어른들에게도 쉽지 않다. 두 남녀 주인공의 이름이 같다는 특이한 설정은 이뤄지기 쉽지 않은 관계라는 장애 요인을 깔아놓은 것이다.
 누구든 호감 있는 이성을 만날 수 있지만 또 서로 좋아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랑이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외부 요인으로 많은 풋사랑은 표현되지 못한 채 그냥 지나가버린다. 도서카드 뒷면에 소심하게 그려놓은 초상화처럼.

 이 영화는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자신에게 왔었던 줄도 몰랐던 첫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첫사랑 남자아이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여자후지이 이츠키 입장에서는 참 슬픈 이야기이다.

3. 눈 속의 잠자리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여학생 후지이 이츠키는 중 2 겨울, 아버지의 죽음을 겪게 된다. 소녀는 상복을 입고 눈길을 걷다가 눈 속의 죽은 잠자리를 보게 된다. 그리고 말한다. 아빠는 정말 돌아가셨구나.

 눈 속 죽은 잠자리처럼 여학생 이츠키의 기억은 봉인되었다. 여자 이츠키는 병원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로 병원에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 때문에 자신의 감기를 방치했다가 결국 위험한 상황에 처할 정도이다. 억지로 간 병원에서 대기하며 졸다가 응급실로 실려가는 위독한 아버지의 꿈을 꾸고 '후지이 이츠키' 라며 부르는 간호사의 소리에 어린 시절 출석 부르는 소리에 '네' 라고 동시에 대답했다가 남학생 이츠키의 얼굴을 본 난감한 순간의 꿈도 꾼다. 이때 나온 노래가 ost 중 'frozen summer' 라는 곡이다. 즉 남학생 이츠키에 대한 기억은 죽은 잠자리 위에 덮인 눈처럼 봉인되어있었던 것이다. 시기가 아버지의 죽음과 겹치기도 했고 그녀에겐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기억이었으니까. 그러다가 편지를 계기로 덮고 있던 눈이 녹고 그 속에 숨어있던 첫사랑이 고스란히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여름처럼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기억은 통채로 얼어붙어 심연 속으로 감춰져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이 영화는 와타나베 히로코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자 후지이 이츠키의 이야기로 보인다.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가는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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