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 독서모임
1. 어떻게 읽으셨나? '30년도 전에 미러링을 한 시대를 앞서간 소설이다, 파격적인 설정이 당시 소설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는 극찬과 페미니즘을 뒤집어쓴 '신파소설', 더 나아가 ‘페미니스트는 이상하다는 식의 재현은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우습게' 여겨도 괜찮다는 식의 인식을 낳게 한다‘ 는 혹평이 있었다. 어느 쪽에 공감하시나?
- 어릴 때 읽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강민주가 멋지다 결말이 안타깝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십 몇 년이 지난 지금 읽으니 강민주는 결국 범죄자이고 정신병자이며 반사회적 인격 장애 중 소시오패스인 것 같다. 과대망상증 환자 같기도 하다. 왜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페미니즘을 베스트셀러에 이용한 느낌이 들어 불편했다. 좀 더 페미니즘에 유리하게 쓸 수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시대를 아주 앞서간 소설인 것은 분명하다. '82년생 김지영' 이 2016년에 나왔는데 사실 소설 속 내용은 많은 여성들이 실제 겪은 에피소드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이 소설에 비하면 엄청나게 온건한 편인데도 정말 욕을 많이 먹었다. 그에 비하면 이 소설은 납치에 폭행에...91년도에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 파격적이다.
-작가는 페미니즘 소설을 쓰려고 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레이블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책의 본질을 가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당연히 작가는 페미니즘 소설을 쓰려고 한 건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양귀자 작가는 대중적인 소설가이고 그녀의 다른 작품들에 딱히 페미니즘적 성격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페미니즘 소설이라기보다 페미니즘 논란을 불러일으킨 소설 같다.
2. 인물들에 대한 생각은?
1) 강민주
-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 소시오패스에 과대망상증 환자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왜 페미니스트를 이런 괴물로 그렸어야 했냐는 아쉬움이 있다.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른 우월한 존재이고 신의 대리인이다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부분이 정말 섬뜩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엄마의 하나뿐인 기쁨과 자랑으로 커와서 그런 것 같다. 무엇보다도 정말 정이 안 갔다.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없다.
-앞부분은 그랬지만 후반부 백승하 부분에서 인간적인 감정을 보인다. 남기를 도구로만 대했지만 백승하로 인해 남기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백승하를 통해 치유받은 것 같았다. 아버지가 백승하 같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소시오패스 같은 면도 어린 시절 경험 때문이다. .
-나는 소시오패스란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바를 표현하려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지 않나 싶었다.
-나는 후반부에 캐릭터가 변한 것 같지 않다. 페미니즘 소설이라기보단 범죄소설로 읽었다. 페미니즘은 범죄를 합리화하는 도구일 뿐이다. 책 속 범죄는 소시오패스에 의한 범죄로 보인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문제이다.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변혁을 이뤄나가야야 하는데 자신이 신이라 생각하고 내가 기르던 두 남자가 통제를 벗어나자 무리수를 두다가 파국으로 간다. 완벽하다 생각하는 것이 깨어진 것이지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 같진 않다.
-신의 자녀 어쩌고 하는 부분도 기독교에 대한 미러링으로 읽혔다. 기독교는 정말 남성중심적이지 않나. 이브도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다고 한다. 기독교적인 여성 비하를 뒤집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닐까.
-아들 납치한 부분이 소시오패스적인 부분이 극에 달한 부분이다. 본인의 행동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 미치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납치당해서 감금, 사육당하고 있는 장면을 아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일인지에 대한 인지를 전혀 못한다. 그걸 본인이 자비를 베풀어준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정말 소름끼쳤다. 그만큼 주변 사람들과 소통이 전혀 안된다. 사회화가 전혀 되지 못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 사상을 가졌다면서 왜 강민주 주변에 여성 동조자가 전혀 없는지도 의문이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 같아도 이런 여자분이 주변에 있다면 지인으로라도 곁에 두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인간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친구, 지인이 전혀 없고 오직 자기한테 복종하는 남기밖에 없다. 자라면서 사회화 과정을 아예 안거친 것 같다. 상담소에서는 맨날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듣는다. 물려받은 부가 많으니 직장생활이나 남에게 아쉬운 소리도 안 해도 된다.
-지식은 있지만 지성적인 사람은 아니다. 지성은 모든 것을 포괄한다. 멍청한 사람이 똑똑한 척하면 웃긴데 읽으면서 계속 웃겼다.
2) 백승하
-외모와 성격 모두 이상적인 남성상이다. 세상에 없는 남자 같은 느낌이다. 내면에 악이라는 게 거의 없는 느낌.
-납치된 이후가 비현실적이다. 8개월이면 꽤 긴 기간인데 가족이 있는데도 나갈 생각을 너무 안한다. 하다못해 창문 밖에다 도움을 요청하거나 쪽지를 떨어뜨리는 등 여러 시도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소설의 진행을 위해서 그냥 잠자코 있는 느낌이다. 판타지 같기도 하고 마네킹 같기도 한 느낌이다. -스톡홀름 신드롬이 생각났다. 그에게 민주는 유일한 구원자였을 것이고 그래서 호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강민주로 하여금 남성을 파괴하고자 하는 신념을 되돌리게 만드는 존재이다. 정말 흥미로운 설정이었다.
-강민주는 남자는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모든 남성들이 아빠, 혹은 전화 속 남성들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그 부분이 과대망상이다. 백승하를 만나며 그것이 깨어졌다.
3) 남기
-상남자, 의리에 죽고 사는 남자 느낌이다. 그런데 굳이 민주를 그렇게까지 죽여야 했나? 질투 반, 추락하는 게 보기 싫은 마음 반인가?
-동갑 여자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도 기괴하다.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가 떠올랐다.
- 강민주, 남기 둘 다 사회화된 존재는 아니다. 일반적인 인간군상과는 괴리되어 있다.
-남기가 민주 사랑하게 되는 과정도 설득력 있다. 주변에서 전혀 못 본 여성, 지성이 있는 여성이다. 무식함이 충직함이 되는 단순함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경제적 격차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그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주고 집까지 사준다. 민주 모녀가 줄기차게 가스라이팅해왔을 것이다. 나를 거역하거나 벗어나면 절대 지금처럼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민주는 남기를 하인 다루듯이 하는데 하인도 그렇게 짓밟진 않을 것 같다.
-민주는 남자인 너희도 한 번 당해봐라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남자들에 대한 분노를 남기에게 투영한 것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남녀의 위치가 전도된 모습으로 이 소설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민주를 죽인 마음은 깨끗하게 가게 해주겠다, 자신에게 여신과도 같은 존재인 민주가 당하는 꼴은 못 본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저 성격으로 감옥 같은 데 가서도 적응해서 못 살 것이 뻔하다.
-제목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 금지된 것이 남기에게는 민주일 것이다. 민주에게는 백승하 혹은 백승하로 표상되는 남성과 이룰 정상 가족에 대한 열망일 수도 있다. 민주가 결혼을 한다면 계층이 다른 남기와는 할 수 없다. 민주가 점점 부드러워지고 변화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남기는 그 변화를 진심으로 싫어한다. 어차피 나와 결혼할 수는 없을 테니 파괴한 것 아닐까.
4)김인수
-정말 소름끼치는 캐릭터였다. 그 시대에는 열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던 시대이다. 그대로 두면 스토킹 범죄로 발전했을 것 같다.
-김인수의 행동이 스토킹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당신의 주민 번호를 알고 있다고 한 시점부터 이미 스토킹 범죄이다. 강민주의 가장 큰 실수는 김인수를 너무 우습게 봤다는 것이다. 결국 김인수 때문에 발목 잡혀서 나락으로 가게 된다. 나였다면 김인수부터 밟아놨을 것 같다.
3. 결말에 대해 어떻게 보셨나? 매우 파격적이고 인상적인데 예상하셨는지?
-충격적이지만 엄청 깔끔하다. 소설의 결말로서는 잘 설정했다. 강민주가 하얀 드레스를 입을 때 그녀가 죽을 것을 예상했다.
-백승하가 민주를 죽이려는 시도를 할 줄 알았다. 아들을 데려와서 자비를 베풀어준다 생각하는 강민주의 사고방식이 너무 끔찍하고 민주에게 호의적이었던 백승하지만 이 순간 민주에게 치를 떨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강민주는 정말 아이 같다.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춘 사람이다. 마치 엄마한테 칭찬받으려는 아이처럼 단순하게 백승하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데려다주면 좋아해줄 거라 생각한다.
-그녀에게 백승하의 아이는 백승하가 아끼는 애완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하루 데려와서 놀게 해주는 것이다. 나는 신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성과 인격이 없는 존재이다. 백승하는 제외되었으니 그가 원하는 것을 그냥 베풀어주는 것이다.
-나는 백승하 와이프를 데려오려했다는 부분에서 정말 놀랐다, 백승하에 대한 감정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보통은 부인을 질투하지 않나? 절대 안 데려올 것 같은데?
-강민주는 백승하를 사랑하는 것조차 인지를 못하는 상태이다. 일반 여자같으면 와이프는 절대 안 데려올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게 뭐지? 생각하고 그걸 가져다주고 싶은 마음인데 그게 사랑인 줄도 모른다.
-어쨌든 아들 납치를 계기로 드디어 강민주를 혐오하게 되고 가족 곁에 가고 싶어진 백승하가 강민주를 소품인 식칼로 죽이고 그런 백승하를 남기가 죽이는 결말을 예상했다. 고결하고 훌륭한 사람이 죽을 때 독자는 비극성을 느낀다. 그 역할을 백승하가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기가 강민주를 공격해서 너무 놀랐다.
- 이 결말이 더 마음에 드는 이유는 어쨌든 범죄자이고 논란의 인물인 강민주가 그 죗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녀의 죽음이 주는 메시지와 울림이 크다.
4. 강민주의 가장 큰 실수를 꼽자면?
-애초에 타겟 설정이 잘못되었다. 여성들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하여 죽음으로 모는 악당 같은 남자를 설정해야 했다. 유명한 여성 살인마나 꼭 연예인으로 해야 했다면 백승하에게 말한 케이스(배우를 시켜주겠다며 농락한 후 모든 기회를 차단해서 성매매 업소로 가게 만드는)에 해당하는 남자라도 말이다. 엉뚱한 착한 남자를 타겟으로 설정하는 바람에 결국 그 남자에게 빠져서 일을 그르치지 않았나. 작가 입장에선 독자의 공감을 놓쳤다고 생각한다. 타겟을 악당으로 설정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바질란테 스토리로 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
-나쁜 놈을 납치했으면 통쾌했을 수도 있지만 뻔했을 것 같다. 흔한 정의구현 스토리로 갔을 것 같다.
-흔한가. 여성들을 괴롭히다 죽이는 남성 범죄자를 사적 제재하며 대중들의 호응 속에 점점 괴물로 변하다가 몰락하는 스토리가 더 재미있을 것 같고 주인공에게 공감도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베테랑 2와 비슷한 스토리이긴 하다 (웃음)
5.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인가? 강민주의 행동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여성들과의 `함께하는 진보'와는 상관없는 일탈행위에 불과하다는 평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은?
- 우리나라는 유독 페미니즘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 같다. 왜 항상 올곧은, 바른, 모두가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불편함을 가지지 않는 그런 방식이어야 하나. 나는 사적 제재 자체를 옹호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여주인공의 방식을 찬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이 더 도덕적이고 바른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도 페미니즘 소설로 읽진 않았다. 성별을 바꾸면 범죄소설이라 하지 남성우월주의 소설이라고 하지 않을것이다.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게 오히려 책의 본질을 가리는 느낌이다.
-올곧은, 반듯한 페미니즘만을 강요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워마드 같은 데 올라온다는 남성 독립 운동가 비하글 같은 걸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다라고 적힌 사진짤 같은 걸 보면 화가 난다. 왜 페미니즘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이렇게 된 것에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의 잘못은 없나.
-그런 짤을 올리는 사람 본인도 정신병자다. 양쪽 다 똑같다.
-우리나라 페미니즘은 변질되었기 때문에 그런 의견이 생기는 것이다.
-변질? 그럼 변질되지 않은 페미니즘은 어떤 페미니즘이어야 하나? 그럴 때 쓰는 말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이다. 페미니즘조차 남성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 사실 여기 나오는 상담소장 같은 분이 상식적인 페미니스트라 볼 수 있다. 이런 분들이 천천히 점진적으로 세상을 바꿔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사람들이 재미없어서 안 볼 것 같다(웃음)
6. 강민주가 그처럼 분노하는 여성억압의 현실이란 것도 실은 간접체험에 불과하고 상담일을 하며 다른 여성들에게 냉소적 태도와 우월성을 보이는데 이같은 태도는 그녀의 자본주의적 부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가 작가라면 강민주를 좀 더 멋있게 그릴 것 같다. 자수성가한 여성 사업가가 여성을 학대하는 남자 악당을 납치하여 단죄하는 식으로 말이다. 강민주의 권력은 바로 본인이 소유한 부에서 나오는데 그조차도 물려받은 것이다. 그녀는 그냥 세상 모르는 속편한 상속녀에 불과하다. 자기 힘으로 천원 한 장 벌어본 적이 없다.
-나는 상속녀라서 더 부럽던데. 상속받은 돈이어야 달콤하지 않나. 내가 번 돈이면 땀냄새나서 마음대로 쓰지도 못할 것 같다. (웃음)
-남성이라는 성 자체도 태어날 때부터 무상으로 주어진 것 아닌가? 상속도 그런 의미의 변주라고 보았다.
-오, 그런 식으로는 생각도 못했다. 진정한 미러링인가. (웃음)
7.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옹호 댓글을 달고 강민주 팬클럽을 만들 것’ 이라는 의견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소름끼치는 생각이다. 강민주는 어쨌든 실정법을 위반했고 납치, 감금, 폭행은 피해자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기는 범죄이다. 그런 말들이 상식적인 사람들이 페미니즘에서 돌아서게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앞부분은 오, 이 여자 좀 멋있네 했지만 뒤로 갈수록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었다. 심정적으로 이해는 가지만 응원은 못 한다.
8. 제목의 금지는 무엇을 의미할까?
-강민주에게는 여성이 남자에게 억압받지 않는 세상, 남녀가 평등한 세상, 더 나아가 여성도 권력에 참여하는 세상을 의미할 것 같다.
-강민주는 백승하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면서 백승하를 사랑하게 된다. 백승하 같은 남자, 혹은 그와 이루는 가정이 강민주의 새로운 소망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남기에게 금지된 것은 강민주일 것이다. 그에게 강민주는 금지된 꿈, 이룰 수 없는 꿈일 것 같다.
<책 속 한 줄>
맑다, 이 계절은.
하늘이 어찌 푸른지 마치 다른 별에 와 있는 것 같다. 가을에서는 맑디맑은 실로폰 소리가 들린다. 두 귀를 기울이면 또르르 굴러가는 이슬같은 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랬다. 나는 그녀들이 간절히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나는 비로소 내가 초월자라는 것을, 응징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전화 속의 고뇌에 찬 음성들이 새롭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요? 그렇지요?'
외줄타기의 곡예사가 외줄과 대결하듯이 인간도 인간의 삶의 외줄과 대결한다. 이 대결에서도 절망은 버려야 할 대상이다. 대결자들은 멀리는 보지만 굴러떨어질 나락을 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 이미 대결은 시작되었고, 남은 것은 이기는 일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인기 여배우가 백지수표를 받고 몸을 팔 수 있다면, 인기 남자배우도 여자한테 팔려갈 수 있는 것이다. 왜 안되는가. 남자들의 동물적인 욕정, 노출된 여자들은 모두 노리개로 파악하는 공공연한 매춘, 구애의 권리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으로 아는 이 사회의 고정관념을 나는 역으로 깨부술 수도 있다.
"여자와 남자의 문제만큼 심정적인 것이 또 있을까요? 사회의 지배제도가 남자에게 유리하게 통용되는 한은 어떤 완벽한 법도 여자들의 고통을 보상해줄 수 없어요."
여자의 삶이 남자와 상관없이 독립적일 수는 없는가. 남자가 사라졌다 한들 자식까지 돌보지 못할 정도로 무너지는 일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나는 연약한 이 땅의 여자들에게 절망한다. 내가 벌이고 있는 남자들과의 전쟁에서 진정한 동성의 협력자를 얻는 일은 정녕 불가능한다. 어차피 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홀로 치르는 전쟁, 끝까지 혼자 가겠다는 내 결심은 더욱 굳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