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으면'을 ==> '안아야'로 바꾸면 무서운 말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재외한국학교에서 5년간 근무하다가 귀국한 지 만4 년에 접어들고 있다. 귀국 후 반갑게 만난 친구이자 동료 교사들은 5년간의 한국의 변화를 설명하며 내게 ‘교권 보호 보험’에 가입할 것을 권했다.
‘교직원 안심 보험’이라는 생소한 보험 상품에 만감이 교차했다. 공적인 일을 수행하다가 일어난 일을 사적인 보험에 가입까지 해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인가? 물론 시도 교육청에 교원 관련 보험이 있다. 그러나 막상 구체적 사안에서는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동료들은 이야기했다.
다행히 귀국하고 지금까지 교권위원회나 아동학대 등의 상황으로 인한 어려움 없이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솔직히 단 한 번도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례 때마다 혹시 지각하는 학생이 있으면 행여 늦잠을 자고 있는지, 등굣길에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미인정(무단)지각으로 처리되어 대입 진학에 감점되는 상황이 우려되어 빠짐없이 전화를 걸었었다. 학생이 전화를 받게 되면 ‘빨리 오라는 말’ 대신 ‘가능한 제 시간’에 ‘안전하게’ 올 것을 당부했다. ‘빨리 오라는 말’은 아이를 재촉하기 때문에 행여 ‘학대’에 해당할 수 있다는 선배 교사의 농담 반 진담 반 조언을 듣고,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쓰던 ‘빨리’라는 언어를 개선해서 학생의 부담을 줄이면서 지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조심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 거의 매일 지각하던 학생에게 7개월 남짓 전화를 걸던 중, 그날따라 유독 전화를 받는 학생의 문제성 태도에 다소 큰 목소리로 빨리 올 것을 이야기하자 곁에 계시던 학부모께서 들으시고는 평소 담임의 등교 전화가 아이를 피곤하게 한다는 불만을 제기하신 적이 있다.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이런 유사한 일을 겪을 때마다 교사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공동체 생활에 피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학생이 있거나, 개인의 성장에 있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학생이 있을 때, 때로는 쓴소리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상황에서 교사로서 고민에 빠진다. 아무리 ‘애정이 어린’ 마음을 담아 고민 끝에 적당한 단어를 선택해서 ‘지도’를 해도 누군가에게 ‘쓴소리’는 그냥 ‘고약한 쓴맛’으로 다가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학생의 문제 행동을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할 말이 있어도 입을 다문 교사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학생 및 교육은 아무런 긍정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을 '안아야'로 바꾸면 무서운 말이 된다.
그러나 현시대는 아무것도 하지 안아야 무탈할 수 있는 상황으로 교사를 내모는 듯하다. 결국 규정된 업무 외에는 하지 않는 사무적인 교사가 보호받을 수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는 결코 우리가 꿈꾸는 교사상은 아닐 것이다. 이 시대가 기대하는 ‘교사상’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현실적으로 고민할 때이다.
경상일보 교단일기 칼럼에 기고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