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할 줄 아는 사랑
어려서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 환경 탓에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그래선지 자연스레 집안일에 손을 대어야 했고, 그 덕에 철이 일찍 들었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라왔다. 다들 어렵게 살던 그 시절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기에 어머니는 항상 동생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차려 주시고는 일터에 다녀오셨다. 물론 풍족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의 고생이 마음에 걸렸기에 그마저도 감사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집에 잘 계시지 않았다. 멀리 배를 타러 다니시기도 하고, 막노동 현장을 장기간 다니시느라 얼굴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끔씩 집에 오시는 날이면 맛있는 음식을 잔뜩 사 오시곤 했다. 형편에 맞지 않게 무얼 그리 많이 사 왔냐며 어머니는 늘 잔소리를 하셨다. 동생과 나는 평소 잘 먹지 않는 음식을 먹으며 많이 행복해했었다. 하지만 늘 불안했다. 다 같이 음식을 먹는 순간은 두 분이 다투는 날이 많았기에 오늘은 별 일 없기를 내심 바랬던 기억도 있다.
특별할 것 없던 그런 소소한 삶이 계속되며 어느덧 머리가 굵어졌다. 머리가 커지며 가지게 된 부모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항상 빠듯한 경제적 상황 때문에 열심히 돈을 아껴야 한다고 무서우리만큼 교육받았고 그로 인해 내 스스로를 옥죄는 게 버릇이 되어 버렸다. 식사자리의 행복한 기대보다 두 분이 다투는 날이 아니기를 바랐던 적도 많다. 항상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했다.
그로 인해 내가 배운 것은 처절하게 아껴야 되는 것과, 힘들어도 잘 참아야 되는 것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과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다 괜찮았다. 하지만 못 입고, 못 가지고, 못 먹어도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마음이라도 충분히 표현해 주셨더라면, 충분히 느끼게 해 주셨더라면 나는 그 시절을 그렇게 힘들게만 버티며 살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추운 골방에 누워 내가 처한 현실 때문에 그렇게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일기장이 그렇게 눈물 자국으로 얼룩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창피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을 것이다. 남들과 비교하기에 급급한 성격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걱정과 겁이 많은 사람으로 자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자살을 머리에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며, 세상을 비뚤게만 보는 눈을 갖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저 따스한 스킨십과, 온화한 미소와, 든든한 마음의 화로가 될 수 있는 사랑의 자그마한 표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사랑이 담긴 나지막한 말 한마디로도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자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고, 배울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아내에게도 아이에게도 나는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보고 배우고 자라 그저 '몸만 커버린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내의 "당신은 사랑을 주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야."라는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스스로 부모님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내 모습이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아이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만 품은 채 당연히 그것을 느낄 것이라는 나만의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 또한 아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받은 유산이었고, 내가 물려줄 유산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내 진짜 모습임을 인정해야 했다.
달라지기로 했다. 달라져야만 했다. 내 아이가 나와 같은 감정을 갖고 자라 나처럼 사랑을 줄줄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내 사랑을 아이가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으로 인해 또 다른 내가 탄생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사랑은 마음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은 그저 가슴속에 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랑의 완성은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교감이고 공감이고 위대한 유산이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