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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Sep 24. 2024

진숙 언니

예전에 비하면 간소해졌지만 명절은 그 자체로 고단한 것 같다. 명절이 주는 설렘과 반가움만큼 부담감과 고단함이 함께 있는 것이 명절의 생리인 것 같기도 하다. 추석 명절을 보내고 노곤한 심신을 명절증후군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하면서 게으름을 부린 명절 다음날이었다. 한 해의 행사 하나가 지나갔다는 후련함과 안도감, 잘했다는 자족감 등이 뒤섞인 노곤함으로 거실 소파에 누워 TV를 켰다. 꼭 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습관적으로 켠 것이다.      


무심히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추석 특집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방영하는 것을 보았다. 역시 명화는 명화구나. 1939년에 처음 상영된 영화가 85년이 넘어가는 지금도 특집으로 방영되고 있다니. 이 소설 한 권으로 영원한 소설가가 된 원작자 마가렛 미첼,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지금도 보는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비비안 리, 클라크 게이블 등 불멸의 인물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과 영화는 작품으로 남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한 영화였기에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이 보았지만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영화 속에 다시 빠져 들었다. 상큼하고 앙큼한 스칼렛 비비안 리, 비비안 리는 그 자체로 스칼렛이었고 레트 클라크 게이블, 클라크 게이블은 또 그 자체로 레트였다. 떠나는 레트를 붙잡지 못하고 오열하는 스칼렛을 안타까워하며 그렇지만 결코 그렇게 주저앉지 않을 스칼렛임을 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어떤 기시감 속에 앉아 있었다. 내 주변 어딘가에 스칼렛이 있던 느낌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 주저앉지 않고 끝없이 개척하고 개척하여 쟁취해 내었던 스칼렛. 바로 진숙 언니였다.        


진숙 언니가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91세. 구십 세의 할머니를 아직도 할머니라 부르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있는 진숙 언니는 상큼하고 예뻤다. 모두들 진숙 언니가 늙어가는 모습을 관심 있게 바라보면서 역시 예쁘게 늙어가시는구나 하였다. 모두들 복 받은 삶이라고 부러워하였다. 진숙 언니의 평생은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유족하고 유복하였다.      


언니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운 주변 사람들도 언니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언니는 어린 시절도 유복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언니는 어린 시절을 끝내 말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장례 때, 식구들을 통하여 흘러나온 언니의 어린 시절은 유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언니는 일본 식민지 시절이었던 1930년대에 만주 연길에서 태어났다.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난 실향민의 자녀였던 것이다. 그때 연길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모여든 사람들의 거주지였다. 그곳은 서구 문화를 일찍 접하였던 기독교도들이 모여들었던 곳인 만큼 서양식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언니의 십 대 시절은 이런 대륙의 분위기 속에서 가족과 함께였을 것이다.      


해방이 되고 북쪽은 공산 치하가 되었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해방이 될 때까지 만주 인근을 임시 거주지로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북쪽 사람으로 살든지, 남쪽 사람으로 살든지, 아니면 만주 지역에 그대로 남든지 결정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해방 전보다 더 혼란스러운 나라가 되어 버렸고 온 국민들은 전전긍긍하며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진숙 언니는 전쟁 통에 오빠와 단 둘이 삼팔선을 넘었다. 십 대 후반의 나이였다. 얼핏 내비친 이야기로는 겨우 속옷만 걸치고 철조망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맨 몸으로 아무도 없는 이역만리에 오빠와 단둘이 내던져진 것이었다. 남쪽에는 어차피 연고가 없어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남매를 불쌍히 여긴 교회 사람들과 만주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들의 연고를 따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흘러내려갔다.


순하고 선했던 오빠는 어린 여동생을 끔찍이 위했다. 오빠는 여동생과 함께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며 숙식을 해결하고 교회에서 소개하는 사람들의 집에서 일을 해주고 생계를 유지해 갔다.


함께 다니면서 신세를 지던 두 사람은 서로 살길을 찾아 헤어지게 되었다. 오빠는 고향이 가까운 곳을 찾아 강원도로 갔다. 성실하고 순박하며 선했던 오빠는 교회 일을 돌보면서 소박하고 순박하게 살아갔다. 그러다가 타고난 성실성으로 작게 뛰어든 사업이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빠는 여전히 고향 가까운 강원도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갔다. 진숙 언니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오빠였다.      


진숙 언니는 전라도 땅으로 내려가서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던 피난민들을 따라갔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유치원 선생님이 될 때까지의 고생과 어려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60년대는 유치원이 흔하지 않아 귀족교육이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언니가 간 유치원도 엄청난 규모였던 방직회사의 부속유치원이었다. 시대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가난과 부랑아, 상이군인들이 넘쳐 나던 때였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남북전쟁의 뒤끝 같았을 것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진숙 언니는 안전하게 거할 곳을 찾을 셈이었다.    

    

유치원 선생님으로 근무하면서 언니는 회사가 있는 지역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가난에 시달리고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해서 유행이나 삶의 질이라는 것을 생각도 못하던 꾀죄죄한 때에 언니는 마치 영화 속의 스칼렛처럼 상큼한 원피스 차림에 피아노를 치면서 나긋나긋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았다. 절대로 북쪽 사투리는 쓰지 않고 서울말을 썼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니가 서울 토박이인 세련된 도시 아가씨라고 생각하였다. 교회에서 반주를 도맡아 하였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언니의 모습은 모든 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언니는 상큼하고 예쁜 모습으로 주변에 환한 빛을 뿌리고 다녔다.      


챙겨주는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는 바람에 언니의 결혼은 늦어졌다. 그렇지만 늦게 만난 남편은 언니의 평생의 복이 되었다. 남편은 의사였다. 시골에서 과수원을 운영하였고 정말 좋은 신앙을 가진 부모님은 당신들의 자랑이었던 큰 아들이 천애 고아에 연상이자 노처녀인 삼십 대의 진숙 언니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말없이 받아들이셨다.      


남편은 영화 속의 레트가 아니라 애슐리 같은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선량하게 아내를 여왕처럼 모셨다. 언니의 어떤 점이 좋아서 결혼했느냐고 묻자 자신은 말이 없고 재미가 없는 사람인데 애교 있고 종달새같이 옆에서 재잘거리는 언니가 너무 예뻤고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고 했다. 남편은 평생을 아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아내의 교회 생활, 사회생활을 뒷바라지하였다. 스칼렛처럼 예쁘고 상큼하지만 이기심과 욕심도 있었던 언니의 성격과 삶을 이해하고 자신이 그것을 보완하려고 노력하였다. 언니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였다. 2남 1녀의 자식들을 낳고 키우며 시동생들을 한 집에서 먹이고 가르쳐서 사회로 내보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이 계속되었다. 건강까지도 주셔서 병치레를 하지도 않았다.      


90세가 되던 12월, 언니가 교회에서 넘어졌다, 고관절 골절상을 입었고 수술을 해야 했다. 고관절 수술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검사를 하던 중에 언니가 폐암 말기인 것이 발견되었다. 그동안 전혀 모를 정도로 통증이 없었다. 남편은 자기가 언니의 건강을 소홀히 해서 이런 상황이 되었다고 자책을 했다. 병원에 있는 언니보다 언니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남편이 더 걱정이 될 정도였다. 고관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재활 치료도 잘 진행되었지만 발견된 폐암 때문에 병원에 머물러야 했다. 이미 병원에서 은퇴한 남편은 매일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 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아무리 재활을 잘하고 치료를 열심히 하여도 생체 시계는 정확하게 흘러갔다. 넘어지고 병을 안 지 8개월, 그동안 언니는 더할 수 없는 가족들의 사랑과 주변 사람들의 문병을 받았다. 남편의 더할 수 없는 지극한 간호도 받았다. 사랑하는 부인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던 남편은 8개월을 지나면서 언니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였고 더 이상 간호를 할 기력도 없어졌다.  

   

마지막 날, 언니의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느려지고 체온이 내려가는 것이 느껴지자 목사님을 모시고 온 가족이 모여 임종 예배를 드렸다. 미국에서 온 아들까지 함께였다. 목사님의 마지막 기도가 끝나자 언니는 숨을 멈추었다. 하늘나라로 입성한 것이다. 장례는 성대하고 화사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모든 사람들이 언니의 복된 삶을 이야기했고 선량한 성품을 회상했다. 아무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언니의 숨겨진 미담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남편도 기력을 차리고 웃음으로 언니를 배웅하였다. 밝고 예쁘고 고왔던 한 사람이 또다시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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