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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Oct 01. 2024

진용 할아버지

진용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85세.


갑작스러운 죽음이셨다. 새벽에 화장실에서 쓰러지셨다. 달려 간 사위에게 괜찮다고  하시면서 자리에 누우셨다. 조금 있다가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셔서 119를 불러서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병원에서는 뇌출혈이 심하다고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이 끝나고 할아버지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상태가 위중하였다. 달려온 아들의 손을 잡고 잠깐 정신을 차리기 1시간 남짓. 할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눈을 감으셨다. 85세의 힘들었던 삶이 마감되었다.


진용 할아버지는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많이 배우지를 못했다.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산업화, 근대화의 물결에 맞추어 시골의 청년들이 도시로, 공장으로 유입되던 시기였다. 할아버지도 가까운 도시에 가서 운전기사가 되었다. 쌩쌩 차를 달리면서 본인의 앞날도 그렇게 쭉쭉 뻗어나갈 것을 기대하셨다.


나이가 차서 비슷한 처지의 처자와 결혼을 하였다. 처자는 자식이 귀한 집안의 늦둥이 딸이었다. 장모님의 귀한 외동딸이었지만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식구 많은 오빠 집에 어머니와 얹혀사는 고단한 형편이었다. 중매쟁이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부지런하고 성실하였다. 지체 높은 고위 공무원의 운전기사로, 가사 도우미로 들어가서 한 가족이 되어 그 집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였다. 가장 신나고 의기양양하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젊고 어려운 형편 탓에 성질이 괄괄하였다.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던 할아버지는 당시의 많은 남자들처럼 가정을 살피지 않고 호방하고 호탕하게 살아갔다. 똑똑했던 아내는 아이들을 기르면서 고단하여 남편과 자주 따지고 다투었다. 젊은 혈기가 왕성하던 때였다.


두 사람은 아이들을 끔찍하게 위하고 사랑했다. 특히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오래 받지 못했던 아내는 아이들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쏟는 정성과 자랑이 지나쳐서 주변 사람들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잘 자라 주었다. 부모를 닮아 키도 크고 인물들도 훤칠하였다.


십여 년이 넘게 한 집안처럼 살던 주인 집이 서울로 영전하여 올라가자 두 사람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했다. 남편은 운전으로, 아내는 여전히 남의 집 일을 도우면서 살아갔다.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진학하여 두 사람은 그동안의 고생이 얼마 안 있으면 끝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앞날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미술을 전공했던 큰 딸은 대도시인 서울에서 커다란 사회적 차등과 계급의 차이를 보게 되었다. 포부가 커서 결혼은 안중에도 없었다. 작은 딸은 간호대학에  진학하였다. 간호복을 입은 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탐을 낼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장 자랑이었던 하나뿐인 막내아들은 국립대학에 진학하여 자랑스런 대학생이 되었다. 쑥쑥 자라서 부모의 울타리가 될 것 같았던 아이들이 부모의 눈물이 되고 가슴 앓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행복하던 한때였다.


하나뿐인 아들은 대학에 진학하자 민주화 운동의 투사가 되었다. 똑똑했던 만큼 사회 개혁의 의지가 투철하였고 당시의 대학과 사회 분위기가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을 공부만 할 수 있게 내버려 두지 않던 때였다. 한때의 운동으로 끝날 줄 알았던 투사의 삶은 아들을 감옥을 드나들게 하면서 더욱 공고한 의식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자 아들은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또 감옥을 드나들었다. 남들은 아들을 대단한  인물이라고, 큰일을 할 것이라고 칭찬을 하였지만 부모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고 자랑이었던 아들은 애까심이 되었다. 한없이 불쌍하고 안쓰럽지만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고 야속한 아들이었다.


더 큰일이 벌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지방의 병원에서 근무하던 둘째 딸이 몇 달이 못되어 큰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근무가 끝나고 저녁 회식을 위하여 읍내로 나가 저녁을 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병원으로 돌아오던  차 안에서 성폭력을 당할 위험에 직면한 딸이 막 움직이던 차 문을 열고 뛰쳐나오다 차에서 떨어져 뇌를 다치는 사고가 난 것이었다. 머리를 다친 딸은 유치원생 정도의 지능과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몸도 자유롭게 쓰지 못하였다. 딸의 이런 상태에 혼비백산한 부모는 모든 생업을 놓고 딸의 치료에 사방을 뛰어다녔지만 결국은 장애인으로 남게 되었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딸에게 병원은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가해자도 전혀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내린 딸의 실수로 상황은 끝나 버렸다. 평생을 지적, 신체적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딸만 남았다.


그 뒤로 집안의 모든 것이 딸을 돌보는 위주로 돌아갔다. 보호자가 붙어야만 하는 탓에 어머니와 이미 나이 들어 경제활동을 그만 둔 아버지가 딸의 간호를 전담했다. 한참 꿈을 향해 달려가던 큰 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아들은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진용 할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고 부인에게 모질게 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의 잘못을 철저하게 뉘우치면서 부인과  함께 딸의 뒷바라지에 전념하였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던 성당에 나가면서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기도를 바쳤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요  자기의 잘못이라고 날마다 회개하였다. 형편은 어려웠지만 분위기는 따뜻하고 화목하였다.


딸의 뒷바라지가 십여 년을 넘어가자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고령에 가슴 앓이, 신체적 과로 탓이었다. 다리, 허리, 심장 등 성한 곳이 없이 허약한 노인으로 병원에 가고 입원하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의 몫이 그대로 할아버지의 일이 되었다. 다행히 큰 딸이 기둥이 되어 전적으로 집안 일에 뛰어들었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곁을 맴돌던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남자는 기꺼이 여자의 친정을 위해 함께  헌신하겠다고 나섰다.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아들은 감옥에서 나와 회사에 들어가 노조 일을 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 불편한 딸과  병든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고 하셨다. 마침 고향 근처에 집이 하나 나왔고 근처에 요양원도 있어서 좋은 조건이라 생각하고 서둘러서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하기로 하였다. 추석 무렵, 이사 올 집에 들러  이것저것 손을 보고 할아버지는 흡족해하셨다. 마침 함께 살기로 한 사위가 새 일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할아버지는 이제 우리 집이 풀릴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기쁘게 저녁을 드시고 잠자리에 누우셨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던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 그리고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고단했던 삶이 비로소 안식을 찾고 긴 휴식에 들어가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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