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팔팔이삼사’라는 말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노년을 상징하는 말로 회자되었던 말이다.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만 시름시름 아프다가 죽자’는 의미였다. 누구나 원하는 노년이었고 부러워하는 마지막이지만 과연 그렇게 살다 죽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이상적인 이야기로 떠돌아다녔다. 그렇게 살기를 목표로 하자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서강 선생님은 실제로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이삼 주 아프다가 돌아가셨다. 돌아다니던 말 그대로 ‘구구팔팔이삼사’ 하셨던 것이다.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백수(白壽)’라는 말이 있다. ‘백수(白壽)’란 희수(喜壽:77세)· 미수(米壽:88세)와 같은 나이의 별칭으로 99세, 즉 아흔아홉 살을 뜻한다. 여기서 '백(白)'은 '일백백(百)'에서 '한 일(一)'을 뺀 것으로, 100-1=99가 되기 때문에 백수(白壽)는 100세에서 한 살이 모자라는 99세를 뜻한다. ‘백수’나 ‘백수 잔치’라는 말이 자주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백수를 사신 분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요즘 아무리 ‘백세 시대’를 부르짖어도 실제로 백세를 살아내시는 분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강 선생님은 4월에 다니시던 직장과 집에서 백수 잔치를 받으시고 6월에 돌아가셨다. 말 그대로 4월까지 바깥출입을 하시면서 사회생활을 하셨다는 것이다. 4월에 20여 년 넘게 다니시던 보험회사에서 회사 최초의 일이라면서 서강 선생님을 초청하여 백수 잔치를 열어 주었다. 서강 선생님은 거기에 참석하여 축하를 받으시고 일장 연설의 답사를 하시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셨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1년을 더 채우셔서 백세까지 사시라는 덕담을 들었다. 듣는 선생님이나 말하는 사람들도 선생님이 일 년 더 사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백세를 채우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만큼 건강하셨던 것이다. 자녀들도 회사에서 백수 잔치를 해 주는 것을 보고는 부랴부랴 아버지의 백수 잔치를 챙겨 드렸다. 주변에서 백수 잔치를 하였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지 못한 탓이었다. 즐겁고 화기애애한 백수 잔치였다.
그러고 두 달 정도가 지난 6월 중순 무렵, 서강 선생님께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랴부랴 달려간 자식들 앞에 선생님은 쇠약한 모습으로 누워 계셨다. 이삼일 밥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식사를 못하신 탓에 기력을 차리지 못하신 것이었다. 병원으로 옮겨 링거를 꽂고 영양제를 투약하였더니 금방 기력을 되찾으시며 집으로 가겠다고 성화를 부리셨다. 그동안 갈고닦은 노력으로 근육은 여전히 탄탄하였고 병원에서도 이런 노인은 처음 본다고 감탄하면서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워낙 고령이신지라 안심할 수 없다고 계속 병원에 계시던 중 이주일이 넘어가면서 폐렴이 왔고 합병증이 왔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서 서강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참으로 짧고도 강렬한 죽음이셨다.
서강 선생님의 삶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같이 한 삶이었다.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직접 몸으로 겪어낸 평생이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일본 식민지 시절에 가난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먹을 것 없는 시골에서 4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님은 교육열이 있었던 아버지 덕분에 시골 소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소학교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소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일본인 선생님은 인정 많고 사명감이 투철한 선생님이셨다. 어려운 조선 학생들을 불쌍히 여겨 따뜻하게 대해 주시면서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학생들에게 꿈을 갖게 하셨다.
이런 선생님의 영향으로 서강 선생님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공부 밖에는 자신의 삶을 개척할 방법이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자신이 보았던 중에서 가장 큰 출세 자리인 면서기가 되었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빠른 공직 진출이었다. 머리가 영리하였고 일본인 선생님에게 들은 것이 많아 꿈이 많았던 서강 선생님은 해방이 되자 부족한 교사를 충원하기 위한 단기 교사 양성반을 통하여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토록 선망하였던 선생님이 된 것이었다.
선생님은 교사를 자신의 평생 직업으로 생각하였다. 해방으로 갑작스럽게 교사가 되었지만 교사로서 부족한 자신의 학력과 경험을 쌓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였다. 방송통신과, 방송통신대, 일반대학, 대학원 등을 다니면서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정년퇴직하기 몇 년 전까지 공부를 계속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셨다. 선생님의 타고난 성실과 노력, 그리고 당시의 사회 환경은 27세의 젊은 시절부터 교감 선생님으로 근무하게 하였고, 교장 선생님으로 30여 년이 가깝게 근무하시다가 정년을 맞으셨다.
그때의 학교법으로 65세에 정년을 하신 선생님은 바로 제2의 사회생활을 준비하여 사회에 뛰어들었다. 막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 보험 일에 뛰어드신 것이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과정의 공부를 다 마치고 선생님은 보험회사 사무실을 차렸다. 넓은 인맥과 타고난 사교력, 그리고 성실성으로 회사에서의 보험 매출액은 언제나 최상위였고 표창장도 매번 선생님의 몫이었다. 젊은 보험인들이 감히 따라오지 못하는 실적을 매달 올리면서 보험인으로서의 전성기를 누렸다.
선생님은 자신이 번 돈의 얼마를 꼭 젊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수시로 밥을 사 먹이면서 젊은 사람들을 격려하였고, 언제나 지금의 자리에서 머물지 말고 계속 노력하고 공부하여 인생을 개척해 나가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러면서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해 준 소학교 때 일본인 선생님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비록 식민지 시절에 만났지만 자신을 학생으로 격려해 주고 삶을 개척하도록 꿈을 심어 주었던 선생님 덕분에 현재의 선생님이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도 그 선생님처럼 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 일본인 선생님은 해방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가셨지만 본인이 선생님이 된 후에 수소문하여 그 선생님을 찾았고 몇 차례 왕래를 하면서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사제간의 정을 쌓았음을 이야기하였다.
선생님은 교사로 처음 발령받았을 때에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자신의 딸을 소개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5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자녀들 모두 성실한 아버지 밑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자라나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평생을 남편의 뒷바라지와 자녀들을 위해 부업을 하면서 남편의 사회생활을 도왔던 부인이 먼저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하자 선생님은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헌신적인 병간호를 하였다. 살면서 서운하게 하였던 자신의 잘못을 씻는다고 부인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돌보셔서 돌아가신 부인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감동을 시키셨다.
선생님의 알찬 인생과 돌아가시기까지의 삶에 대한 숭고한 노력과 헌신은 자녀들과 선생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아버지, 멋진 인생으로서의 본을 보여 주었던 어른으로 기억하게 하고 후회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게 하였다.